그땐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고되고 힘든 순간에 버릇처럼 하는 상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상상은 꽤 구체화되어 계획이 서있었다.
이제 청년백수의 증가율에 힘을 보태게 된 내가 되어 있으니 그동안 계획, 상상, 내 의지로 만들어낸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할 시간이 왔다.
정신없이 살 땐 멍하니 하고 싶었던 딴생각을 할 겨를도 싹둑 끊어냈어야 하기 마련이었으니 쓸데없던 생각 일지라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하고 그리고 그 생각의 결말과 마무리를 잘 지어줄 필요가 있었다.
매일 출근을 하는 청년일꾼이었던 때는 맘속에 항상 할머니를 그리고 살았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거나 피곤을 이기지 못해 힘들 땐 그런 계획 같은 상상은 더 뚜렷해졌다.
내가 할머니가 됐을 때 인생을 함께하며 울고 웃던 나의 물건들을 파는 상점을 열고 싶다는 생각.
사는 집 가까이에.
그러고 보니 마지막 출장 때 뉴욕 빈티지 샵의 할아버지 물건을 보지 못한 게 못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내 물건 그중엔 이미 오래된 빈티지를 구해서 사용해온 물건들도 있을 거고 나와 함께 나이 든 물건들도 있겠지.
게 중 누군가의 눈에 들어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른 이의 인생을 함께할 물건들도 있을 테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나와 함께 그냥 그렇게 지루한 듯 평온한 일상을 지속하는 내 동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난 거기서 하나둘씩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듯 혹은 추억을 정리하듯 그간 함께 시간을 보내주어 고마웠단 인사와 함께 내 물건들을 떠나보내고 하늘나라에 갈 시간이 가까워 오면 가장 심플한 환경 속에 간단명료하게 삶을 정리하고 이 세상을 사직하고 싶단 생각을 자주 했다.
회사를 그만 두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유체이탈의 상태로 감정을 오롯이 느끼며 사는 게
불가능했다.
하루하루가 밀도감 없는 삶 같았고 발이 땅에 닿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내가 진짜 나로 살고 있지 않은 그런 기분이었다.
누가 옆에서 인생 최종 목표나 꿈을 물을 때 자동적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
"지금 제가 원하는 건 빨리 할머니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내일이라도 잠에서 깨면 할머니가 되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하기보다 그냥 날 이상하게 봤던 것 같다.
할머니란 사람들은
힘든 삶을 다 살아냈고 현명함과 수많은 경험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가졌으며 몸의 구석구석이 아프고 주름은 깊을지언정 적어도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게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느릿느릿하는 식사 속에 밥이 주는 맛을 느끼는 여력도 있을 것이고 가끔 나와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구와 영양제 이야기를 하며 평이한 일상을 피부로 느끼고 향을 맡으며 살 거란 생각에.
십 대 때는 이십 대가 되면 엄청난 세상이 열릴 거 같았고 삼십 대가 되면 젊음이 시들해지기 시작할 거 같아 두려워했던 내가 벌써 할머니가 되길 스스로 갈망했다니... 그것도 아주 간절히.
돌이켜 보면 그 상황이 매우 버거웠나 보다.
속내를 드러내거나 약한 모습으로 비치는걸 스스로에게 허용치 않았고 초예 민하게 날이 서있었으며 그게 곪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살았어야 했다.
한치의 여유도 부드러움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몇 년을 살았으니까..
그나마 웃고 나이스 한 모습일 때는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과 기계적인 만남을 가질 때.
사람이 Burn out 상태가 되면 감각이 무뎌진다.
그렇게 더 이상 태워낼 의욕이 없는 상태로 하루하루를 기계처럼 사는 것에 끝이란 게 있을까.. 란 생각은 미래라는 시간을 핑크빛 보단 암울한 늪의 색을 상상하게 했다.
수없이 내 몸에 날아들어 몸에 박힌 화살을 무표정하게 뽑아 던지고 감정 없이 피를 닦는 모습으로
매일을 살았다. 고통도 아픔도 놀라움도 느끼지 못하는 진공의 상태 같았다.
내가 가졌던 직업보다 더 힘든 직업도 세상에 많을 것이고 거뜬히 버텨내는 이들도 많을 것이리라..
그렇지만 그때가 나에게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게 고갈된 한계점이었던 것 같다.
이미 고갈 상태인 스스로를 말 못 하고 표현은 엄두도 못 낸 채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이 많은걸 안다.
그나마 나 죽겠소 소리 내고 있는 내가 복에 겨운 것일 수도 있겠지.
나는 그림을 그려 대학을 갔다. 어릴 때부터 꼼지락 거려 뭘 만드는 걸 좋아했고 공간 꾸미는 것도 좋아했으며 멋 부리는 것 사람 만나는 것 나를 치장하는 것 까지 좋아하는 일이 참 많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방대해서 좀 걱정일 정도였지만 이게 한순간에 제로상태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신기했다.
대학을 졸업하여 원단 회사에 들어가고 디자이너로 일을 하다가 내 가게도 운영해 보았는데 그게 이일을 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최근까지 했던 업무는 총체적 난국처럼 모든 게 짬뽕이었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야 하는 지식이 너무 많았으며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하는.
거기다 오더를 향한 눈치전쟁에 수없는 정치까지. 심하게 말하면 참 지랄 맞았다.
흡연으로 스스로를 달래는 직원은 워낙 많았고 입에 욕을 달고 사는 사람, 매일 술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상사도 있었다.
꼭 이렇게 독하게 살아야 인생을 버틸 수 있는 걸까...
내가 일을 하며 만난 사람 중에는 더없이 사랑했던 후배도 있고 진심을 다해 존경한 선배도 있다.
지나고 보니 어느 정도는 서로의 색이 비슷했기에 이심전심 힘든 일도 같이 버텨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나 싶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독을 가지고 있었던 건 서로의 공통점이었고 각자의 자존감이 강했으며 담백하게 정직했던 사람들이었다고 기억하고 싶다.
그중 한 후배와는 지금도 툭툭 내뱉는 말로 안부를 묻지만 그 안부 자체가 아직도 참 뜨겁다.
마치 2차 세계대전을 같이 겪은 것 같은 전우애의 마음을 서로 갖고 있어서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쳤고 도전적이었고 성격도 급해서 그 직업은 내게 딱 맞는 직업이었으리라. 그만큼 지칠 줄 몰랐고 일을 뜨겁게 사랑했고 출장도 즐겼던 나였는데.
사람이 갑작스럽게 이 모든 걸 놓고 싶은 상황을 마주하면 어떤 두려움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그냥 세상이 멈추는 것처럼 놓게 된다는 걸 알았다. 내일의 걱정이나 쌓아왔던 나름의 경력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회사를 나와서 적어 내려갔던 버킷리스트 중 두 번째였던 전화번호 바꾸기는 실행에 옮겨졌고 대학 때부터 쓰던 번호라 바꾸는 것 자체가 머뭇거려지긴 했다.
혹시나 모르는 인연의 끈 같은 게 모두 끊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했지만 일시적 감정에 휘둘린 행위가 아니라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하기 전의 정리의 의식 같은 것 쯤으로 생각했다.
번호를 바꾸고 최측근의 친구와 가족에게 알리기 전 대략 6시간 정도 지구 상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시간.
잠시였지만 우주 속에 나 혼자 있는 기분이 나쁘지 만은 않았다. 그 후 개인적으로 날 옥죄지 않는 가족과 친구 몇 명에게만 번호가 바뀐 걸 알렸다.
이런 빠듯한 마음이 시간이 흘러 말랑말랑해지면 그때 다시 지금의 날 설명하고 알려줘도 될 거 같아서.
내 마음이 이것밖에 되지 못하는 게 참 못나 보였지만 그때 그 순간만큼은 때 쓰고 있는 내 마음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이제 정말 내 할머니가 생전에 살고 계셨던 시골에 평온한 마음으로 자주 들를 수 있게 된 상황이 다행같이 생각됐다. 더 이상 날 들볶는 이메일도 전화가 울리는 게 꼴 보기 싫어 전화기를 뒤집어 놓는 일도 없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