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부리 Mar 04. 2024

복직을 받아들이는 자세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휴직의 끝에 선 내 마음의 추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육아휴직 급여 지급기간이 18개월로 바뀐 거 아니었어? 그럴 리 없어. 바꾼대 놓고 하반기부터 시행하겠다는 거야? 나 돌아가야 하는 거야?"


"뭐야,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어쩌겠어. 제도가 그렇다는데... 거기다 아파트도 안 팔렸으니 당장에 집을 지을 수도 없고 6개월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집 지을 때 쓰자. 그래. 그러면 돼."


"난 뭘 했지? 한 게 하나도 없네. 집도 못 짓고, 자격증 공부도 손 놔 버린 지 오래고, 신나게 놀러 다니지도 못 했어. 날이 이렇게 좋은데...."


"그래. 난 쉼이 필요했어. 거기다 나름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한 시간들이었어. 이제 돌아가서 파 먹은 통장 잔고도 채우고 네 몫을 해야지. 그럴 시간이 온 거야."


다른 게 있다면 저 다섯 단계가 일주일에도 몇 번씩 도돌이표처럼 돌고 돌았다는 점뿐이다. 하지만 2월의 끝자락, 길고 지루했던 이 겨울이 끝나가듯 주체할 수 없이 세차게 돌고 돌던 감정의 소용돌이도 조금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놓았던 컴활 실기 문제집을 다시 펴 들었고, 아이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녀왔으며, 헤어져야 할 사람들과 다시 만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중 몇과는 간단한 식사를 몇과는 차를 마시기로 했다.


그리고 복직신고 하는 날 회사에 입고 갈 재킷도 샀다. 

연보랏빛에 반짝이는 보석 단추가 달린 트위드 재킷. 

평소의 나라면 내 물건 하나 사는 데 온갖 명분을 찾느라 구매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제 곧 버거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나에게 이 정도 선물은 결코 과하지 않으니까... 기다림의 시간이 길고 지루할 뿐.


주문한 지 일주일이 거의 다 돼 도착한 그 선물은 꽤 감동적이었다.

자칫 보풀이 잔뜩 일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트위드 소재의 옷감이 연한 보랏빛을 입자 여기저기 물망초 무더기를 피워낸 것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향기가 나는 듯해서 당장 입고 나갈 일도 없으면서 거의 매일 꺼내보았다. 그 옷을 입으면 무채색 배경처럼 최대한 도드라지지 않게 살아오던 내 삶도 고운 빛으로 물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면서...

 

휴직 바로 직전 부서가 바뀌었고, 휴직 기간 동안 두 번의 인사이동을 거치며 부장님도 부서원도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많은 것이 바뀐 나의 일터에서 나는 예쁜 물망초가 될지 한 포기 잡초가 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숨죽여 지내고 싶지 않다는 사실.


물망초나 잡초나 똑 같이 밟히기 쉬운 보잘것없는 존재라 해도 하늘을 향해 '나 여기 있소. 아무리 밟아도 이렇게 고운 꽃을 품고 살아가고 있소.'라고 대거리라도 한 판 하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물망초만큼만 나를 드러내며 살아봐야지. 연보랏빛 재킷에서 나는 향기를 가슴에 담고



작가의 이전글 일렁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