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
게시판에 자료가 업로드되었다. 첨부자료와 함께, '박대리 수고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얼마나 내 걱정을 해주시는지, 수고로움을 미리 예견하시고 나에게 수고하라 하신다. 제출기한은 이미 지나갔는데. 자료를 열어보기도 무섭다. 자료가 얼마나 정리되지 않았을지, 나에게 얼마나 많은 의문점을 안겨줄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선하다. 이제 눈으로 볼 차례다. 첨부자료를 다운받고 더블클릭. 하,,,안 봐도 선한 것이 눈 앞에 펼쳐지자 울화통은 순식간에 폭발한다. 자료가 엉망이다.
앞으로도 쭈욱 이러한 일들은 반복될 것 같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서 화를 내야 할까?' '다정하게 수정사항을 말씀드려야 할까?'
자료에 대한 판단조차 할 수 없던 신입사원 시절, 받은 자료 그대로 여얼심히 공부해서 자료를 작성했다. 수정이 필요하거나 의문점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 말씀드리고 답변을 받았다. 당연히 필요한 절차지만, 이것이 일정 수준 이하의 자료에 대한 것이라면 문제는 전혀 달라진다. 이건 발목을 붙잡는 수준이 아니다. 발목을 도려내는 수준이다.
짬밥을 먹으면서 나름의 실력이 쌓이다 보니, 더 보이기 시작했다. 자료들의 형편없음이...
그래서 폭발했다. 날카롭게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나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더 이상 '만만이'로 보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를 좀 불편하게 여겨야 일을 더 신경 써서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장생활 20년을 훌쩍 넘긴 아저씨들의 내공 앞에 나의 카리스마는 한낯 애송이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아저씨들은 요동하지 않았다. 아저씨들은 나를 여유롭게 쌩깠다. 한치의 여유를 잃지 않는 굉장한 내공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고, 나는 추가적인 대응도 못한 채 나가떨어졌다. 결국 나만 더 힘들어졌다. 괜히 불편해진 감정만 더해져 연락마저도 더 힘들게 되었다.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더 뺏기게 된 것이다.
사실 더 강력하게 투쟁하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팀장님 또는 상무님 등 더 큰 권위를 등에 업고 피나는 전투를 치른다면 승리의 깃발을 쟁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팀장님이나 상무님이 항상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정당하다고 해도 나의 등 뒤에서는 어떠한 공작이 펼쳐질지 나 같은 애송이는 알 수 없다.
나랑 친한 몇몇의 선배들은 초지일관 정도를 걸으며 그 아저씨들과 등을 지고 산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일도 서로를 향한 불신 때문에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아저씨들이 책임을 떠넘기지 않을까 선배들은 전전긍긍해야 한다. 실체 없는 염려에 휩싸여 쓸데없이 너무 힘들게 사는 듯 보인다.
일만 하기도 힘든 데 말이다.
'가서 화를 내야 할까?' '다정하게 수정사항을 말씀드려야 할까?' 이 질문을 다시 정의하자. 카리스마를 보이며 피곤하게 살 것인가, 만만이로 힘들게 지낼 것인가. 사실 나는 정답을 알지 못한다. 나의 바람은 카리스마를 가지는 것이다. 능력이 무궁무진하며 전투력이 탁월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개인이 조직문화를 넘어서기는 참 힘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들을 상대하는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적을 만들진 말자
선배들의 모습에서 보았듯이, 일만 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내부의 적까지 상대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부의 적을 만들어 에너지를 추가로 소모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기획팀에게 있어 협업은 필수적인 요소다. 자체적으로 자료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타 부서의 협조가 필요하다. 따라서 타 부서 직원과 관계가 틀어지면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없다. 차라리 좀 더 귀찮게 하는, 똑똑한 만만이가 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같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