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땐땐 Feb 10. 2021

대충 하다 골로 간다.

꼼꼼함

합법적으로 딴짓이 허락된 것만 같은 어느 나른한 금요일 오후, 모니터를 보며 놀고 있던 찰나, 팀장님이 내가 작성한 결재판을 들고 내려오신다. 나에게로 오신다. 심상치가 않다. 

"박 oo, 계산기 들고 이리 와 봐." 나는 파일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계산기를 들고 팀장님께로 갔다. 탁탁 탁탁, 계산기를 때려본 팀장님이 한마디 하셨다. "아,, 계산이 틀리네." 나는 땀이 삐질 흘렀다. 엑셀이라 그럴 일이 없을 텐데,,


경위는 이러했다. 팀장님은 예산 결재를 위해 사장님실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사장님이 보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계산이 안 맞는데?"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계산기를 때리셨다. 그 결과, 계산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팀장님은 곧장 내려와 나를 데리고 계산기를 다시 때려본 것이었다. 나는 황당해서 곧장 엑셀 파일을 열어봤다. 셀을 하나하나 확인했는데,, 아뿔싸,, 몇몇 셀이 수식에 걸려 있지 않았다.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계산기로 내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싶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예산 항목은 몇십 개? 한 백개?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 많은 숫자들을 보고 사장님은 어떻게 계산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나의 추측은 이렇다. 아마 예산의 대분류 항목들만 암산으로 계산하시며 보신 것 같다. 

그럼에도 의문점이 든다. 그 대분류도 10개는 넘을 텐데, 그걸 계산하시면서 결재를 하셨다고? 작은 돈도 아닌데,, 음,,

아!! 생각이 났다. 아마 끝자리만 계산해서 예산 합계의 끝자리와 맞는지 확인하셨을 것이다.

 * 검산:xxx5, 예산 합계:xxx9 불일치 ㅡㅡ

나는 이걸 어떻게 생각했을까? 비슷한 경우를 당해봐서 아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또 의문점이 생긴다. 보통의 사장님들은 그렇게 덧셈 검산은 하지 않으실 텐데,,,

사장님이 왜 그러셨을까?


격동의 제5공화국 시절, 사장님은 계산기 하나로 예산을 편성하셨던 분이다. 현재 엑셀을 사용하고 있는 나로서는 전설 속의 인물인 샘이다. 사장님은 평생을 나와 같은 일을 하시면서 관리본부장, 부사장에 이르러 사장까지 되셨다. 그러므로 덧셈, 뺄셈, 검산은 그에게 있어 거스를 수 없는 본능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팀장님은 사장님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매번 멘붕에 빠지셨다. 결국 나까지 결재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사장님은 뜬금없이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작년 oo 얼마야?", "oo 경위가 어떻게 되지?" 

당황스러웠던 점은 팀장님과 내가 헷갈려하거나 쭈뼛쭈뼛하고 있으면 사장님께서는 자랑스럽게 답을 직접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마치 본인이 공부한 것 또는 알고 있는 걸 자랑하고 싶어 하셨던 것 같고,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결재를 들어가기 전에 사장님이 물어보실만한 것들을 머릿속에, 수첩 속에 미리 기록했다. 

결재를 준비하는 내 마음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장수의 심정과 같았다.


사실 리더가 은는이가, 줄 간격, 글자체 이런 사소한 것으로만 트집을 잡으면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빨간펜으로 그런 거나 지적하고 있는 리더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배알이 꼴리고 숨이 목구멍까지 막히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사장님의 질문과 지적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집어넣었던 것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고, 머리와 수첩에 기록하는 행동들이 습관이 되었으며 숫자를 꼼꼼하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획팀은 숫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엑셀을 다루는 일이 많은데, 엑셀은 작은 실수가 큰 실수로 연결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수점과 잘못 입력된 셀이 연결되고 연결되어 결괏값의 큰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꼼꼼하지 않으면 골로 가는 경우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더 꼼꼼하게 체크해야 한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자잘한 실수가 반복되면 신뢰를 잃게 된다. 신뢰를 잃었다는 것은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전체 맥락을 읽는 것만큼이나 꼼꼼함 역시 실력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만만한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