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백의 중요성
법무담당 차장님이 우리 팀에 잠시 들렀다.
"oo소송 대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
이미 1심, 2심에서 패소했던 터라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후속조치였다.
그때 나는 사원이었으나 기획팀 짬밥으로는 왕고였다. 입사 후 2년 반이 지날 무렵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다른 팀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그 후속조치를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소송이 내가 입사하기 훨씬 전에 발생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원 나부랭이가.
이 소송은 회사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현금흐름상 수백억 원이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속조치 자료를 작성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사원 나부랭이가 이런 자료를 작성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건가. 회사가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자료 작성을 위해 먼저 현금흐름을 추정한다. 향후 물가, 운영비, 매출, 법인세 등을 추정해서 현금흐름표를 만든다. 그다음 현금흐름이 첨부된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 제목: oo소송 패소에 따른 현금흐름 검토
- 소송 현황-> 현금흐름 분석-> 결과(운영에 문제없음, 주주수익률 문제없음)
작성된 보고서를 가지고 팀 회의를 했다.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음, 완벽하구만!' 이렇게 자화자찬 오바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피드백이 없는 것도 뭔가 모르게 찝찝했다. 그래서 입사 당시 사수 과장님께 찾아갔다. "과장님, 자료 좀 검토해주세요." 과장님은 흔쾌히 검토해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좋은데 하나만 고치자." 그 하나가 굉장히 의외였다.
그 하는 바로
"제목에 패소를 결과로 고쳐"
나는 그때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oo소송 패소에 따른 현금흐름 검토'
'oo소송 결과에 따른 현금흐름 검토'
실상 같은 말인데, 이 보고서를 읽는 사람 입장에서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송은 이미 2심까지 판결이 났고,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회사 입장에서도 충분히 대응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보고서를 읽는 사람이 패소라는 글자를 먼저 보고 이 보고서를 읽게 되면 처음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잔뜩 가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뭔가 큰일이 새로 일어난 듯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바라볼 우려가 있다.
패소를 결과로 고친다고 내용의 결론이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패소' 보다는 '결과'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단어 하나 바꿨을 뿐인데 뭔가 큰 맥락이 바뀐 느낌이었다.
이 보고서를 가지고 상무님과 사원 나부랭이가 여기저기 다니며 보고를 잘 마무리했다.
당시 이 보고서를 쓰면서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어와 표현뿐이겠는가. 보고서의 분량 자체도 굉장히 중요하다. 분량이 너무 많으면 읽기도 싫을뿐더러, 뭔가 큰 문제가 발생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려고 하다 중요한 결론이 흐지부지 되는 경우도 많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었을 때도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전달된다면 좋은 보고서임에 틀림없다. '지식의 저주'에 빠지게 되면 나만 아는 보고서가 된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절대 자신의 보고서를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많이 두들겨 맞아야 맷집이 생기는 것처럼 보고서도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때 좋은 보고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