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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땐땐 Feb 11. 2021

단어 하나 차이일 뿐인데

피드백의 중요성


법무담당 차장님이 우리 팀에 잠시 들렀다.

"oo소송 대법원에서 패소했습니다."

이미 1심, 2심에서 패소했던 터라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후속조치였다.

그때 나는 사원이었으나 기획팀 짬밥으로는 왕고였다. 입사 후 2년 반이 지날 무렵 나를 제외한 모두가 다른 팀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그 후속조치를 내가 할 수밖에 없었다. 소송이 내가 입사하기 훨씬 전에 발생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원 나부랭이가.


이 소송은 회사 입장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현금흐름상 수백억 원이 감소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속조치 자료를 작성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사원 나부랭이가 이런 자료를 작성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건가. 회사가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어떡하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자료 작성을 위해 먼저 현금흐름을 추정한다. 향후 물가, 운영비, 매출, 법인세 등을 추정해서 현금흐름표를 만든다. 그다음 현금흐름이 첨부된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다.


- 제목: oo소송 패소에 따른 현금흐름 검토

- 소송 현황-> 현금흐름 분석-> 결과(운영에 문제없음, 주주수익률 문제없음)


작성된 보고서를 가지고 팀 회의를 했다.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음, 완벽하구만!' 이렇게 자화자찬 오바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피드백이 없는 것도 뭔가 모르게 찝찝했다. 그래서 입사 당시 사수 과장님께 찾아갔다. "과장님, 자료 좀 검토해주세요." 과장님은 흔쾌히 검토해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 좋은데 하나만 고치자." 그 하나가 굉장히 의외였다.

그 하는 바로

"제목에 패소를 결과로 고쳐"


나는 그때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oo소송 패소에 따른 현금흐름 검토'

'oo소송 결과에 따른 현금흐름 검토'

실상 같은 말인데, 이 보고서를 읽는 사람 입장에서 느낌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소송은 이미 2심까지 판결이 났고,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회사 입장에서도 충분히 대응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보고서를 읽는 사람이 패소라는 글자를 먼저 보고 이 보고서를 읽게 되면 처음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잔뜩 가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뭔가 큰일이 새로 일어난 듯 문제를 더 심각하게 바라볼 우려가 있다.


패소를 결과로 고친다고 내용의 결론이 바뀌진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패소' 보다는 '결과'가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단어 하나 바꿨을 뿐인데 뭔가 큰 맥락이 바뀐 느낌이었다.


이 보고서를 가지고 상무님과 사원 나부랭이가 여기저기 다니며 보고를 잘 마무리했다.


당시 이 보고서를 쓰면서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어와 표현뿐이겠는가. 보고서의 분량 자체도 굉장히 중요하다. 분량이 너무 많으면 읽기도 싫을뿐더러, 뭔가 큰 문제가 발생된 것 같은 느낌도 준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려고 하다 중요한 결론이 흐지부지 되는 경우도 많다.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읽었을 때도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전달된다면 좋은 보고서임에 틀림없다. '지식의 저주'에 빠지게 되면 나만 아는 보고서가 된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절대 자신의 보고서를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많이 두들겨 맞아야 맷집이 생기는 것처럼 보고서도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때 좋은 보고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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