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의 시간, 너를 만나 달라진 세상
나는 쌤이었고, 기자였고, 위원이었다. 월급쟁이로 10여년을 살고 나서 출산과 육아를 위해 임기제 공무원을 그만두었을 때만 해도 나는 그렇게 나의 신분(?)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출판사나 신문사는 직장이라기보다는 직업을 고민하게 했었고 보수도 최저임금 수준이었기에 어디 가도 그 정도 돈은 못 벌겠나 싶었다. 임기제 공무원은 말그대로 시한부였으므로 그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 평생 소속은 아닐 거란 생각을 했었다. 일을 그만두어도 나인 것으로 괜찮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쉬는 엄마와 노는 엄마
그런데 막상 일을 그만두고 나니 나의 직업을 물어보는 무수한 요구들에 맞닥뜨렸다. 새로운 앱을 깔고 회원가입을 할 때, 누군가를 새로 만났을 때, 하물며 어떤 설문에 응답할 때 엄마 말고는 현재의 나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보통 엄마는 직업 분류에 없고 ‘자녀가 있습니까?’ 정도 질문에서 끝난다.) 늦게 아이를 가진 나와 달리 내 또래들은 아이가 있다면 초등학생이 보통이고 40대 초중반으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내고 있다. ‘예전에는~’ 이라고 시작하는 말은 왠지 나이든 사람들이 과거의 영광을 말하는 그런 식인 것 같아, 엄마 이외에 다른 수식어를 가진 사람들 앞에서 초라해짐을 느낀다.
물론 나 같은 고용단절 여성도 주변엔 많다. 그녀들도 아이가 두돌을 넘어가며 다시 직장을 찾아보다 보수수준이 출산 전과 다름을 느끼며 휴직이 가능한 직장들을 부러워했다. 일을 ‘쉬는’ 중인 엄마와 '노는' 엄마. 살림은 육아는 노는 일이 아는 걸 알면서도 농담처럼 버릇처럼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정색하고 '우리는 놀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건 아마도 그 말이 내 맘에 억울한, 또는 위축되는 마음을 건드려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과거를 가장 잘 무시하는 금융권
10여년의 직업 경력과 수천만원의 예금, 그간의 거래내역이 있음에도 집이 내 명의로 되어 있거나 최근에 구입한 차가 있지 않아 나는 혼자서 은행통장을 새로 개설할 수도 카드를 새로 발급받을 수도 없었다. 남편의 직장정보 등을 부수적으로 요구했다. (카카오뱅크는 아파트관리비 납부서 등을 요구해서 그나마 새로 개설할 수 있었다) 의료보험이 직장인가입자에서 가족으로 편입되어 납부되고 국민연금이 지역가입자로 바뀌는 것들이 나에게는 어떤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장류진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4대 보험이라는 말에서 주인공이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낀다는 장면이 있다. 내가 시간을 어딘가에 맡기는 대가로 얻게 되는 것들이 돈뿐만 아니라 소속이었음을, 사회가 알아서 분류하고 설명해주었다는 것을 700명이 넘는 나름 큰 조직을 그만두고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하물며 대출을 신청했는데 엄마라서 거절당한다면 그 좌절감은 어떠할지 상상만 해도 우울하다.
나를 설명할 단어 찾기
그래서 다시 소속의 정규직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싶은가 하면 그건 또 모르겠다. 시간에 매여 온 신경을 쏟고 퇴근하고서도 밥값을 해보겠다고 단념하고 외면하지도 못하고 수습하고 벌이고 했던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다시 못한다면 또 그렇게 된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19년에 한번 그 시도를 해보았다. 돌 지나자마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 앞에 있는 마을센터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잠시 일했다. 아이는 다행히 엄마와 떨어지기는 잘했지만 자주 아팠고 시간제였던 나는 계속 시간에 쫓겼다. 일은 일대로 살림은 살림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내 안에서 정리되지 못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서운해하고 울고불고 해버렸다. 다시 그러고 싶지 않다. 그때 내가 정규직에 신청하지 않으면서 소속도 월급도 중요하지만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가정주부? 무직자? 프리랜서?
은행이나 설문에서 굳이 나를 분류할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단어는 '가정주부'이다. 아니면 무직자나 프리랜서 정도를 선택해야 한다. 아는 지역 친구는 그래서 자기는 스스로를 프리랜서 작가라고 부른다 했다. 누가 허가해주는 것이 아니니 글을 쓴다면 누구나 스스로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작가라는 이름이 꼭 맞게 들리지는 않았다. 내 기준에 작가라면 돈이 되든 안 되든 꾸준히 써야 할 것 같고, 뭔가 멋드러진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보통 지역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글을 쓴다. 뭔가 문학적인 글도 아니다. 사람을 인터뷰한 글을 싣거나 어딘가를 소개하는 블로그글을 올린다. 회의록을 쓰거나 사업계획서를 고친다. 그런 내가 작가라니, 되고 싶으면서도 여전히 그 단어의 기세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가정주부 역시 작가와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맞지 않는 스타일의 옷을 입은 느낌이다. 돈을 벌어오는 것보다는 살림을 돌보고 가족을 서포트하는, 그것이 내 업이구나 하고 스스로가 받아들인 사람이 써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자취하는 사람은 보통 가정주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른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말이라는 느낌이다. 그리고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정주부는 육아보다는 살림과 매니징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그런데 나는 육아는 업으로 받아들였지만 가삿일은 겨우겨우 '처리'하고 밀어내는 수준이다. '가정주부(家庭主婦)'라고 하기엔 가정이 '주(主)'가 아니라 '부(附)'인 느낌이라 이것도 별로.
이번에 충남지역 탈석탄 이해관계자 가상인터뷰집 제작에 참여하면서 석탄화력노동자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그러면서 느꼈던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일에 '노동'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석탄화력발전소만 해도 전기의 원리에 대한 책이나 자료는 많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노동이 펼쳐지는지는 거의 찾기 어려웠다. 노동자들에 대한 자료도 EBS '극한직업'이 아니면 2018년 김용균 씨의 사망사고 이후 것이 대부분이었다. 석탄은 그 자체로 연료여서 자잘한 것은 날아다녀서 유해하고 열에 굳어진 것은 잔고장을 일으키고 전과정에서 사람의 손을 요구한다. 산업혁명 이후 가장 오래된 연료, 그래서 그 노동의 역사와도 노조와도 연관이 깊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노동이 멀게만 느껴질까. 왜 많은 담론들에서 당위는 논의되고 '그래서 그걸로 어떻게 먹고 살 건데?' '그걸로 먹고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건데?'는 빠지는 걸까?
텍스트 일용직, 기타소득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얻고 싶은 단어는 작가나 마을활동가 같은 무엇을에 대한 이름이 아닌, 직장인 4대 보험 같은 내가 하는 노동, 또는 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고는 문득 '텍스트 일용직'이라는 말이 생각 났다. 보통 나는 하루(내지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 글을 쓰고 그 값을 받는 일용직이다. 원고뿐만 아니라 사업계획서, SNS, 행정문서, 자문의견서, 회의록, 블로그 광고알바까지 텍스트를 다룬다. 그림과 사진, 영상도 함께 묶여 때로는 기획, 편집, 콘텐츠 생산 이라고도 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텍스트로 한다. 그리고 텍스트 사이의 콘텍스트(맥락)을 읽어내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텍스트 노동은 내가 기꺼이 업으로 받아들였지만 당연하게도 항상 기쁨을 주는 것만은 아니며 언제나 금전적인 대가를 주는 것도 아니다.
참고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고용형태는 정규직, 기간제, 단시간근로자(주15시간~60시간), 일용직, 특수형태, 파견, 용역, 재택/가내 등의 분류가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소득에 따라서는 금융소득, 부동산 임대 등의 사업 소득, 근로소득, 연금소득, 기타 소득 등으로 나뉜다. 프리랜서는 보통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아 특수형태 노동자로 분류되는데 나는 보통은 한번이면 끝나는 일(일용)이 많고 1년 프로젝트도 두어 건(특수형태) 하고 있으니 이를 포괄하는 비정규직이 더 맞기는 하겠지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 같은 일용직이 더 와닿는다. 수입이 많아 사업자를 낸다면 사업소득자겠지만 이도 아닌 나는 그저 기타 소득자다.
어쨌든 현재 나의 노동을 설명하는 단어를 찾아 혼자 흡족해 하고 있다. SNS프로필 같은 데는 '텍스트 일용직, 기타소득자'라고 써 놓았다. 물론 현실에서 보통은 '알바해요'라고 말한다. 부동산 임대사업주는 '건물주'가 되고, 근로소득자가 '월급쟁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미미한 N잡러는 '그냥 이것저것 알바해요'가 될 것이다. 텍스트 노동이라고 더 대단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육체노동이나 돌봄노동에 비해 날로 먹는다 생각하기에.
그리고 엄마
그래 나는 또 대부분의 시간에는 육아를 홀로 감당하고 있는 '돌봄노동자'이다. 이 단어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돌봄노동자에는 나와 같은 엄마는 물론 어린이집교사, 아이돌봄교사, 요양보호사 등 복지분야 노동자도 포함된다. (다른 얘기지만 아동수당을 돌봄수당으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 애를 위해서 안 쓰려나?) 이 단어 덕분에 많은 돌봄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기는 했지만 사실 일상에서 스스로를 지칭하지는 않게 된다. 그냥 '엄마예요'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반대로 나에게는 '작가'와 같아서 그냥 노동이라고 하기 싫고 그냥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중요한 이유이고 뭔가 대단해 보이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또 드는 것이다.
주절주절 길게도 썼는데 결국 날 소개하는 문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텍스트 일용직인 기타소득자 엄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