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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준모리 Aug 03. 2022

음악글을 쓸 때 음악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가?

음악 글쓰기 3

우리나라 중등 문학교육을 비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수능 국어 시험에 출제된 시 유형 문제를 원작자 시인도 풀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아마 이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한국 교육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도 혀를 찰 것이다. 왜 그것이 문제인지 똑바로 말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과연 ‘원작자도 풀지 못하는 시 문학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온 결과일까? 이에 대해 나는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원작자, 창작자의 권위를 침해한 데 반발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 한국 중등 교육 전반에 대한  


사실 난 원작자가 문제를 틀렸다는 사실이 한국 교육을 비판할 만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원작자가 시를 쓸 때 가지고 있던 작의는 중요하긴 하지만 절대적일 순 없다. 한 가지 작품으로부터 다양한 감상이 나올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원작자의 뜻이 항상 해당 문제의 답이 될 수는 없다. 사실 진짜 문제점은 다른 데 있다. 수능 출제위원의 의도가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술 작품 해석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특정한 누군가의 의견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그것뿐이다. 주체가 창작자여도 말이다. 


래퍼 딥플로우가 한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그는 새로 출시된 라면을 처음 먹을 때만큼은 라면 봉지에 쓰인 조리법대로 끓여 먹는다고 한다. 물론 이후 두 번째부터는 계란을 넣건, 참치를 넣건, 떡을 넣건 맘대로 한단다. 딥플로우가 처음 만난 라면을 대하는 방식은 라면을 만든 사람 혹은 회사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의도를 파악하려는 이유는 그 라면이 가진 오리지널리티를 정확히 알기 위함이다. 그 누구도 결코 그가 오뚜기나 농심의 권위에 눌려 처음 보는 라면에 계란을 넣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라면과 예술 작품은 다르다. 라면은 배를 채워주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라면은 내 맘대로 끓여 먹으면서 예술은 창작자의 의도에 집착할까. 표지판에 불과한 창작자의 의도가 어쩌다가 창작자 권위의 상징으로 격상했나. 그것은 아무래도 ‘위대한’ 예술가 때문일 것이다.


난해하고 어렵고 독창적인 예술 작품을 접하면 보통 이걸 어떻게 만들었나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은 창작자들에게 지적이고 비범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것은 곧 권위가 된다. 스탠리 큐브릭, 제임스 조이스, 밥 딜런 등의 예술가들을 떠올려 보자. 이들의 작품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라는 사실은 웬만큼 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술가의 위대함은 결코 주체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다. 시대가 돕고 수많은 주변인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의 완전한 주인이 아니다. 그들이 창작 과정에서 난해함을 남겨둔 이유는 그들 자신이 깊고 지적인 예술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작품의 난해함, 어려움, 개성 등은 창작자의 위대함을 드러내거나 과시하는 기능이 아니라, 작품이 금방 잊혀지지 않도록 만드는 방부제 기능을 한다. 쉽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오래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창작자의 의도는 소비자가 특정한 감각적 체험으로 진입할 수 있게 돕는다. 이를테면 자전거의 보조 바퀴를 떠올릴 수 있겠다. 하지만 결코 소비자의 능동적 체험을 제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창작자의 의도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모두가 그렇듯 때 되면 보조 바퀴는 자연스럽게 떼버리게 된다. 창작자도 자신의 창작물을 완벽 통제할 수 없다. 그들은 오직 게임을 제안하는 이다. 게임의 알파는 되어도 오메가는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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