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송재경) 《고고학자》 앨범 리뷰
음악 리뷰
‘좋은 음악’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좋은 음악이 될까? 담론적인 차원 말고, 그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말이다. 아마 음악의 퀄리티만으로는 설명이 안될 것이다. 사람마다 기준과 취향이 다르니까. 또 한 사람에게도 좋은 음악의 여러 기준과 스펙트럼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엔 힙합과 90년대 발라드를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음악은 방방 뛸 수 있게 만들어 줘서 좋은 음악이 되었다. 아래층으로부터 들어올 민원을 잊게 할 정도의 음악이라면 그럴 자격 있다. 또 어떤 음악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어 좋은 음악이 되었다. 한 노래는 깊은 고민과 질문을 안겨다 주어서, 또 다른 음악은 나를 슬픔에 잠기게 만들어서 애정을 갖게 되었다. 나의 '좋은 음악'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내게 왔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음악들은 공통점이 있다. 나의 기억 속 어느 순간에 존재감을 드러내며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9와 숫자들의 프런트 맨인 ‘9’ 곧 송재경의 솔로 앨범 ≪고고학자≫ 역시 내게 좋은 음악이다. 이 앨범 이전 9와 숫자들로 발표한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멜로디와 좋은 가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앨범으로 다시 한번 잔잔하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청자를 포근히 감싸는 송라이터임을 증명한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앨범 수록곡 중 하나의 제목을 빌려와 말할 수 있겠다. 그의 가창으로 구현되는 멜로디와 가사는 ‘문학’적이고 ‘소년’스럽다. 하지만 이 앨범이 내게 좋은 음악인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좋은 음악’의 역할에 대해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의 제목이기도 한 ‘고고학자’를 떠올려보자. 앨범 소개글에도 쓰였듯 ‘발굴’과 ‘복원’의 작업이 이 앨범의 목표였다. 무엇을 발굴하고 복원하는가? 바로 송재경 본인이 사랑하던 옛 음악들이지 않을까. 그가 들어온 좋은 음악들이 송재경의 손으로 발굴되고 복원되어서 결과적으로 이런 앨범이 탄생한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9와 숫자들 커리어에도 복고적 음악은 중요한 포인트였다. 1집이나 EP <유예>에서 복고를 전면적으로 내세웠었으니 말이다. 더 이상 복고의 느낌을 가져가지 않기로 한 듯한 9와 숫자들의 방향과 별개로 송재경은 솔로 앨범에서 망설임 없이 옛스러움을 드러낸다. 이 옛스러움은 단순히 한국 옛가요의 사운드와 멜로디를 레퍼런스 삼는 것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송재경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향과 이를 스타일로 구축한 태도와 방식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첫 곡 방공호의 첫 가사 구절은 이렇다.
“들어와요. 어서 들어와요. 내가 만든 작은 세상으로.”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봄이 오면 함께 떠나요. 모든 슬픔 여기 가둬두고서. 모든 두려움 다 떨쳐버리고.”
이 구절들은 이 앨범을 공간적으로 구현한다. 앨범의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플레이되는 동안 청자는 방공호라는 작은 공간, ‘작은 세상’에 일시적으로 머무른다. 음악이 넘쳐나는 스트리밍 시대에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들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는 꿋꿋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앨범을 구성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트랙들은 모두 일상 속 사소한 순간이나 그로 인한 여파에 대한 노래들이다. 손금을 봐주겠다며 슬며시 손을 잡는 행위(3번 트랙 “손금”)나 “네 맘이 궁금해서 건네본 한 마디”(4번 트랙 “문학소년”) 등은 이후 “길고 고단한 여행이 돼” 버리거나 “부질없는 후회”와 “추억이란 쳇바퀴에 갇”혀버리게 만든다. (5번 트랙 “메트로폴리스”)
이러한 기억의 장면들을 끈질기게 포착해낸 송재경은 마지막 트랙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흩어진 조각을 모아, 잊혀진 추억을 깨워. (…중략…) 작은 것들을 지키고, 낡은 것들을 되살려,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러한 구절은 곧 나의 ‘좋은 음악’들이 내게 해주는 일과 같다. 추억을 깨우고, 낡은 것을 되살려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일. 다시 말해, 나의 기억 속 소중한 순간들을 일깨워주는 일 말이다. 과거의 사랑과 고난을 태워버려야 한다고 노래하는 가사(6번 트랙 "Burn")도 사실은 정반대의 기능을 하고 있다. 사랑을 태워버려야 한다던 과거의 ‘나’를 소환해낸 '노래'는, 지금의 내가 더 고고하고 도도하고 담담하고 우아해질 수 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