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하루 일과를 바꿔버리는 사람들
23년 4월
상간소장을 받은 지 한 달이 다 돼 가도록 상간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살면서 소송을 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더구나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불륜을 하다 상대 배우자에게 들켜서 상간소장을 받으면
보통 한 달 이내에 변호사를 선임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서면을 낸다고 하는데 상간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처럼.
소장이 송달되고 한 달이 되면 변론기일지정신청서를 내달라고 변호사에게 말해놓고
상간녀가 무변론으로 나와 원고 완승으로 판결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간소송이 시작된 걸 아는 유책이가 며칠은 눈치 보며 일찍 들어오는가 싶더니 다시 늦어지기 시작했다.
"나 오늘 아빠방에서 잘래"
“아빠도 없는데 빈방에서 혼자 자려고? 안 무서워?”
"아빠가 들어와서 날 보면 회사일 때문에 힘들었어도 기분 좋아지고,
나랑 같이 자려고 내일부턴 일찍 들어올걸~“
둘째가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며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아빠를 기다리면서 작은방에서 혼자 자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약간 어질 하니 얼떨떨했다.
아빠가 늦는 이유가 회사일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아이에게 잔인한 현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 우와 멋진 생각이다. 우리 둘째가 아빠 힘내라고 작은방에서 혼자 자면서 아빠 기다리는 거야?
엄마는 둘째랑 같이 못 자서 아쉽지만 괜찮아.”
나중에 이 모든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슬플까.
둘째의 어린 마음이 가여워서 눈물이 났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지금까지 자기 전에 매일매일 책을 읽어주는데
둘째는 책을 듣다가 졸리다며 베개를 들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졸리면 그냥 자도 되는데 꾸역꾸역 베개를 들고 작은방으로 건너가는 걸 보니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아빠를 기다리는지가 보여서 안쓰러웠다.
급하게 읽던 책을 덮고 둘째를 따라가서 잠자리도 봐주고 이불도 덮어주면서 정말 괜찮은지 한번 더 물었다.
괜찮다는 대답에 방안 불을 꺼주며 문을 살짝 열어뒀다.
안방문도 살짝 열어두고 누웠다.
유책이한테 전화를 하니 받질 않는다.
내키지 않았지만 둘째가 걸려서 카톡을 보냈다.
“둘째가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고 혼자 작은방에서 자고 있어. 어디야? 어딘데 아직도 안 들어와?”
읽었지만 대꾸가 없다.
참지 못하고 또 전화를 했다.
이미 술에 만취된 목소리로 유책이가 전화를 받는다
“남편을 속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게.
너 증거 잘 잡던데, 찾아봐 내가 어디 있는지.
맞춰봐 내가 누구랑 있는지 ㅋㅋㅋ
앞으로 전화하지 마. 안 받을 거니까 “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유책이의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거니 전원이 꺼져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내며 큰애 앞에서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읽던 책을 마저 다 읽어주고 안방 불을 껐다.
뒤척이던 큰애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가 달라졌다.
시계는 어느덧 1시를 넘어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두근거리는 심장, 막연한 불안감과 끝이 없는 분노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랑 비슷하게 외도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카페에 글을 올렸다.
'상간소장을 받고도 무대응으로 뻔뻔하게 나오고 있는 상간녀와 반성 없는 유책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발 도와주세요'
삑~ 삑! 삑~ / 삑
현관문이 열리며 유책이가 들어왔다.
술에 절어서 비틀거리는 모습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한숨 자고 씻고 왔는지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좌절감이 밀려들면서, 모든 확신이 사라져 버렸다.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체념한 듯이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누구랑 있다 온 거야? 둘째가 작은방에서 혼자 잔다고 문자까지 보냈는데,
일찍 좀 들어오지."
"ㅋㅋㅋ 맞춰봐~!"
유책이가 비아냥대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지 마. 나는 당신한테 화가 난 게 아냐. 가정 있는 남자를 꼬신 그 여자한테 화가 난거지.
정신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와.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그러나 유책이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꾸도 없이 작은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나의 영혼은 채찍을 맞은 것처럼 바르르 떨렸다.
새벽 3시.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유책이 몸에서 나던 비누냄새가 지워지지 않았다.
분명 그 여자랑 같이 있다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직장동료인지, 골프밴드에서 만난 여자인지.
작은 소리라도 날까 봐 기어가듯이 안방을 나와 작은방으로 갔다.
살짝 작은방 문고리를 돌려보니 문이 열렸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억누르고 조심스레 유책이 머리맡에 놓인 차키를 집어 들었다.
주차장에서 유책이의 차를 열고 미리 준비해 둔 블랙박스의 유심칩을 바꿔놨다.
작은 유심칩을 잃어버릴까 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를 꽉 움켜쥐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젯밤에 적어놓은 글을 보고 누군가가 채팅을 걸어왔다.
불륜의 증거가 절박한 외도 피해자들을 상대로 도와준다며 다가와서
돈을 뜯어가는 사기꾼들이 많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선뜻 채팅에 답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답이 없자 계속 채팅이 왔다.
"저도 외도 피해자예요. 저는 아이가 13개월이고, 유책이는 집을 나갔어요. 현재 이혼소송이랑
상간소 같이 하고 있어요."
"지금 저랑 비슷한 처지 언니랑 같이 찜질방 가려고 했다가 님 글 보고 채팅 보내요.
꼭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이건 겪어본 사람만이 알잖아요."
이 정도까지 자기를 소개하는 걸 보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먼저 연락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행이네요. 5분만 더 기다려보고 대답 없으면 찜질방 가려고 했어요"
집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긴장된 얼굴로 약속장소인 커피숍을 들어가자 젊은 여자 둘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이구나'
"안녕하세요. 아까 채팅으로 얘기했던 스텔라입니다."
"네, 앉으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지금 많이 힘드시죠? 증거가 없으세요"
"아니.. 증거는 많이 모아서 상간소장을 집으로 보냈는데 뭐 하는 여자인지 알고 싶어서요"
"뭐라도 집히는 거 있으세요"
"블랙박스 보면 회사랑 먼 곳에 있는 식당을 자주 가요. 거길 왜 자주 가는지 모르겠어요"
"사진 있어요?"
"네, 보여드릴게요"
"우리가 가볼게요. 그 식당"
가방과 핸드폰을 허겁지겁 챙기며 말했다.
"네? 찜질방은요?"
사진 속 이 여자가 거기 식당 사장인지
종업원인지 둘이 점심때마다 만나는
장소인지 알아야 하잖아요"
스텔라님은 아는 얼굴이라 거기 가면 안돼요. 가더라도 우리가 가야지"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드려요"
평생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겠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5년을 넘게 같이 살며 자식까지 낳았지만 도덕적인 예의도 없이 불륜으로 배신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반면,
생면부지 처음 만난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하루 일과를 바꿔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그 두 사람은 점심시간에 맞춰 차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가슴을 가득 채우던 그 끈적끈적한 냉기가 떠올라 초조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띠링~!
문자가 왔다.
종업원 유니폼을 입고 음식을 나르는 여자 사진
유책이의 상간녀는 식당 종업원이었다.
'스텔라님 우리 테이블에 세팅해 주러 와서 자세히 봤는데
이 여자 보통 아닌 거 같아요. 흔한 식당 아줌마가 아니에요.
혼자 풀메이크업 하고 일하는데요, 아마 이 여자는 처음 아닌 거 같아요.'
작년부터 처자식도 내팽개치고 몰래 만나고 다니던 여자가
식당 종업원이라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내불륜이거나 유관기관에서 일하는 여자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돈이 많이 드는 골프를 치고
벤츠를 타고 다니는 것도 아이러니했다.
담당 변호사에게
상간녀가 식당 종업원이라 상간소송이 그 여자한테는 별 타격도 없을 것 같다고 말하자
변호사의 냉정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차가운 전화기를 뚫고 날아왔다.
많은 의뢰인님들이 배우자의 불륜 상대가
본인들보다 못생기거나 뚱뚱하다고,
혹은 직업이 별로라서 놀라는 분들이 많은데
불륜은 결혼 상대자를 고르는 게 아니니
당연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