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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일 Feb 21. 2021

단어의 진상 #64

하늘 맑은 5월이었으면 좋겠다

아니 찬바람 살짝 부는 10월도 좋겠다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날

노을이 붉어 술이 땡기는 날

간만에 반가운 사람들 만나 

껍데기에 소주 한 잔 하고

알딸딸 취해 와서 마누라에게 욕먹고

간만에 놀러 온 딸 붙잡고

맥주 딱 한 병씩만 마시자

아빠는 그 나이에 아직 술이 들어가

내가 진짜 술 없었으면 이 세상 못 살았다

그렇다고 내가 대강 산 건 아니다

이 정도 버텼으면 인정해주라

응 그건 인정

그래 그래 그러면 됐다

진짜 그러면 됐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몰래

끊었던 담배 한 개비 필 때

뿌연 연기 위로

커다랗고 둥근달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색깔로 

환하게 웃고 있는 보름달이면 됐다

그러면 됐다

진짜 그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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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의 진상> 달     


평범하게 죽고 싶다

나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죽지도 말고

반 지하 구석에서 비참하게 혼자서 죽지도 말고

인공호흡기 꽂고 요양병원에 누워 죽는 것도 모르고 죽지도 말고

평생 그토록 벗어나 보고자 했던 평범함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그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또 깨닫는 그 어느 날 

달이 환하게 뜬 날에 죽고 싶다.     


인생을 살아보니 알겠다.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렇게 꿈꾸고 노력하고 또 포기하며 살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아무리 해도 완벽한 해피엔딩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렇게 평범할 것이라는 것을 알겠다.

그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겠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날도

적당히 실수하고 적당히 후회하고 

적당히 반성하고 적당히 만족하다 가고 싶다.

내일은 나아질 거라고 꿈을 꾸다 가고 싶다.

그런 평범한 날에 잠을 자듯 가고 싶다.     


운이 좀 더 좋다면

친구가 보고 싶고 가족이 반가운 날

술 한 잔이 아직 맛있고 담배 한 모금이 아직 그리운 날

돌아보니 그렇게 부끄럽게 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날

바람은 살랑 부는 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니 하얗게 달이 뜬 날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커다란 보름달이 뜬 날

그런 날에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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