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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Apr 07. 2024

조경가 정영선의 우리 땅 사랑법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 정영선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가슴이 뛰듯, 우리가 섬세히 손질하고 쓰다듬고 가꾸는 정원들이 모든 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땅에 쓰는 시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과수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정영선(b. 1941)은 존 옴스비 싸이언스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1960)’을 읽으며 조경가의 꿈을 키운다. 어릴 때부터 시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그가 농과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결사 반대했으나 그를 무척 아꼈던 시인 박목월 선생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한 덕분에 원하던 농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로 조경 설계일을 하며 땅에 아름다운 시를 써 내려갔다. 

지금까지 50여 년의 조경인생 동안 정영선은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개발 드라이브의 역사를 거치면서 콘크리트로 뒤덮일 뻔한 여의도 샛강을 살리고, 철거될 뻔한 정수장 시설을 지속가능한 선유도 생태공원으로  살린 것도 그다.  소중한 허파 같은 녹지와 정원, 공원들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배경에 그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세계를 조명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영선 :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에서 4월 5일 개막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전경 (사진 함혜리)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세계를 조명하는 전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식목일인 4월 5일 개막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건축전은 수차례 열렸지만  조경가의 삶과 작업에 집중하는 전시는 처음이다.  전시 제목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했다. 

봄부터 시작해  가을의 초입인 9월 22일(일)까지 계속되는 전시는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업을 되짚어 보며, 1970년대 대학원생 시절부터 현재 진행형인 프로젝트까지 반세기 동안 성실하게 펼쳐 온 조경 활동을 총망라하는 자리다. 그가 해온 수백여 개의 프로젝트 가운데 60여 개를 추려  내 조경가의 아카이브를  최초로 공개하며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각종 기록자료 5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조망한다.  이지회 큐레이터는 "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주제별 대표작을 엄선해 선보임으로써 도시 공간 속 자연적 환경이 설계된 맥락과 고민, 예술적 노력을 드러내고, 이러한 사유와 철학을 조경건축의 직능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1세대 조경가 정영선.(사진 함혜리)

 정영선의 우리 땅 읽기 

기자간담회에서 정영선은 " 산과 바다, 강물이 흐르는 우리 땅은 다른 나라와 확연히 다르다. 우리 땅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바탕에서 내 것을 먼저 알고 , 알록달록하지 않아도 이 땅에서 자생하는 고유종을 중심으로  한국 풍경에 맞는 디자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시는 정영선의 작품 세계를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와 민간 기업이 의뢰한 정원과 리조트, 역사 쓰기의 방법론으로서 기념비적 조경과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등 작업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재구성했다. 연대기적 서사를 지양한 이러한 접근 방식은 경제 부흥과 민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발현된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도 맥을 같이 하는 동시에 수많은 유형의 작업들이 공통적으로 정영선이 강조하는 “지사(地史)적 맥락”, 즉 '터의 무늬'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 조경가는 연결사"라는 그의 말처럼 정영선은 사람과 경관과의 관계, 건축과 도시, 나아가 대지의 관계를 해석하고 디자인했다.  특히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땅의 특성'과  '시간성'이다. 삼면이 바다이고, 국토의 70%가 산악인 우리나라의 지세는 중국과도 다르고, 일본과도 다르다. 그는 "우리 땅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바탕에서 조경 디자인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디자인 작업은 있는 듯, 없는 듯, 안 꾸민 듯 꾸민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조경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다룬다.  그래서 그는 긴 시간을 두고 식생을 관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미래를 그리며 현재를 디자인한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전시는 크게 7개의 ‘묶음’으로 나뉜다. 정영선의 조경이 그러하듯 경계가 느슨한 최소한의 구획을 통해 관람객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각 프로젝트의 맥락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자연주의 정원 속을 거닐 듯 서로 배타적이지 않은 주제들의 우연한 마주함과 포개어짐을 의도했다.

첫 번째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에서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조경의 사례를 살펴본다. 한국 최초의 근대 공원인 <탑골공원> 개선사업(2002)과 ‘비움의 미’를 강조한 <광화문광장> 재정비(2009), 일제강점기 철길 중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체 자본으로 건설된 경춘선을 공원화 한 <경춘선숲길> (2015~2017) 등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을 전환하고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방법론으로서 조경의 역할이 드러난 프로젝트를 확인할 수 있다.

경춘선숲길 철교 전경, 2018. 작가 소장.

두 번째 묶음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은 주요 국제 행사 개최와 더불어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화된 도시 경관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동원된 사업을 다룬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및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 <대전엑스포>(1993) 등 한국의 경제, 문화, 기술적 도약의 기회였던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들을 통해 조경가가 어떻게 발전된 도시 모습의 비전을 제시함과 동시에 인공적인 개발 사업에 땅의 논리를 연결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세 번째 묶음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생활’은 경제 성장이 동반한 생활양식의 변화로 수요가 생긴 가족단위 여가활동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정영선은 예술, 교육, 체육, 관광 등 각 문화기관과 레저시설의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고유의 지형과 땅의 맥락을 살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종합문화 예술단지 <예술의전당>(1988)의 조경 구상도와 모형 사진, 스포츠 중심의 휴양 리조트 <휘닉스파크>(1995)의 식재계획도와 피칭 자료 등이 공개되며 이는 1980~90년대 당시 디자이너의 소통 방식을 엿보게 한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인문학 레지던시 <두내원>(2025 예정)도 소개되는데, 마르틴 하이데거의『숲길』에서 영감을 받은 산책로의 개념 스케치가 공개된다.

네 번째 묶음 ‘정원의 재발견’은 선조로부터 향유되어 온 우리 고유의 식재와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들여다본다. 전통정원 요소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무대가 된 호암미술관의 <희원>(1997)으로 시작해 경기도와 중국 광저우 사이의 교류 정원으로 조성된 광동성 월수공원의 <해동경기원>(2005),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개인 정원 <포항 별서 정원>(2008) 등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면서 ‘깊은 주름’의 지형을 만들어 점진적으로 경관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전통 정원의 내적 원리를 재현”한 사례를 만날 수 있다.

호암미술관 희원 식재 현황도, 1997, 트레싱지에 펜. 101 x 87 cm. 작가 소장.

다섯 번째 묶음 ‘조경과 건축의 대화’는 건축과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탄생한 조경 작업을 살펴본다. 제주 오설록(2011, 2023)의 <티뮤지엄>, <티테라스>, <티스톤>, <이니스프리> 건축물 사이 조성한 제주 특유의 지형을 살린 개인 주택인 <모헌>(2011)의 중정 정원에 담긴 깊은 숲의 풍경, 남해 <사우스케이프>(2013)의 건물 사이 바다를 향한 시야를 가로막던 돌 언덕을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 같은 형태로 깎아 연출한 방식 등 땅의 조건을 읽고 이를 중심으로 경관이 조성되는 과정 속에서 조경가와 건축가의 내밀한 상생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섯 번째 묶음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은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을 다룬다. 정영선은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2007), <선유도공원>(2001), <파주출판단지>(2012, 2014) 등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기반 시설에 수공간을 삽입했다. 습지를 복원하고 하천 환경을 개선해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소개된다.

일곱 번째 묶음 ‘식물, 삶의 토양’은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 치유적 속성이 강조된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조명한다. 식물을 가까이하는 삶을 통해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방식을 배울 수 있는 곳들이다.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한국 최초의 <국립수목원>(1987)의 설계 청사진과 남해의 독특한 기후대의 식생을 담은 <완도식물원>(1991)의 조감도, 미국 뉴욕주 북부의 허드슨강 상류에 자리한 원불교 명상원인 <원다르마센터>(2011)를 구상한 수채 그림, 대지와 식생 현황도 등이 공개된다.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서 만나는 정영선의 조경 디자인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이번 전시를 위한 새로운 정원이 조성됐다. 석산인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미술관 내·외부에 재현하고 계절감을 더하는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 식재하여 관람객에게 휴식처를 제공함과 동시에 조경가의 작품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실내 전시에 소개되는 500여 점의 조경 디자인 기록 자료의 다차원적인 연출을 위해 조경의 ‘시간성’에 주목한 정다운 감독의 영상과 사진작가 정지현, 양해남, 김용관, 신경섭 등의 경관 사진도 함께 소개된다. 


컬처램프에 소개된 기사입니다.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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