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4~11.23, 송은
명품 브랜드 구찌(Gucci)와 생로랑(SAINT LAURENT)의 모그룹인 케링(Kering) 그룹의 설립자이자 세계적인 경매사 크리스티의 소유주은 프랑수아 피노(François Pinault) 회장은 기업가인 동시에 동시대 가장 중요한 현대 미술 컬렉터 중 한 명이다. 그가 지난 50년 동안 수집한 컬렉션, 즉 ‘피노컬렉션’은 1960년대의 미술부터 현대에 이르는 1만 점 이상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동시대 미술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겠다는 문화적 야망을 지닌 그는 최근 뮤지엄급 전시공간을 차례로 오픈하고, 대규모 전시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컬렉션을 공개해 왔다.
베니스의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 2006년)를 시작으로 옛 세관건물을 리노베이션 한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2009년), 테아트리노(Teatrino, 2013)를 잇따라 개관하며 현대미술계의 영향력을 키워 온 피노에게도 늘 아쉬움이 있었다. 그의 조국인 프랑스의 수도 파리, 예술의 수도에 미술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지난 2021년 5월 파리 중심부에 위치한 옛 증권거래소 건물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를 리노베이션해 새로운 미술관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을 열었다. 피노 회장과 오랜 기간 감각을 맞춰 온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에 의해 복원 및 개발된 미술관의 역사적인 개관 기획전은 《우베르튀르》(Ouverture, 개관)였다.
팬데믹에서 겨우 벗어난 시기에 열린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 개관전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전시가 서울 강남에서 열리고 있다. 송은문화재단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피노컬렉션과 협력으로 《Portrait of a Collection: Selected Works from the Pinault Collection》전을 9월 4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선보인다. 개최한다.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 설립한 피노 컬렉션은 2011년 아시아 최초로 송은(구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Agony and Ecstasy(고통과 환희)》를 통해 컬렉션 중 일부를 공개한 바 있다. 이후 13년 만에 다시 한번 한국 관람객과 마주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60점가량의 현대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미술관의 개관전 《우베르튀르》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피노컬렉션의 수석 큐레이터 캬롤린 부르주아(Caroline Bourgeois)가 기획을 담당했다. 개관전에 소개됐던 주요 작가들을 포함해 신규 소장작가 등 총 작가 22명( 데이비드 해먼스,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 라이언 갠더, 루돌프 스팅겔, 루카스 아루다, 뤽 튀망, 리넷 이아돔-보아케, 마를렌 뒤마, 미리암 칸, 세르 세르파스, 신이 쳉, 아니카 이, 염지혜, 줄리 머레투, 타티아나 트루베,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폴 타부레, 플로리안 클레버, 피터 도이그)의 회화, 설치, 조각, 비디오, 드로잉 등 다양한 작품이 소개된다.
캬롤린 부르주아는 개막식에 맞춰 열린 간담회에서 “피노컬렉션의 본질을 담아내면서 컬렉션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컬렉션의 초상’이라는 전시명을 갖게 됐다”면서 “프랑수아 피노 회장이 갖고 있는 예술에 대한 열정, 작가들과 유대관계를 지속하면서 작가들을 지원하며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현대미술을 공유하려는 그의 철학을 관찰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부르주아 큐레이터는 피노 회장의 예술가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 기준은 피노 회장만이 답할 수 있을 것”이라며 “피노 회장은 작가가 예술가로서 멀리 갈 수 있는지를 중요시하며 그것을 단 5분 만에 알아차리는 놀라운 안목을 지녔다”고 답했다.
이번 송은에서의 전시는 피노 컬렉션의 특성을 회화적으로 풀어내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우선 작가의 독특한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주요 포인트에 배치했다. 전시는 베트남 출신의 덴마크 작가 얀 보(Danh Vo)의 작품 ‘무제(2020)로 시작된다. 20세기에 제작된 진열장, 청동기 시대의 도끼날, 15세기 중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자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역사적 유물에 가까운 요소들은 각각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지만 절단과 조합이라는 작가의 인위적인 행위(혹은 기계적인 인공성)가 개입되어 새로운 시간성을 가진 조합이 된다. 작품에 사용된 한련화라는 꽃은 과거의 잔재를 딛고 자라는 연약하고 덧없는 생명의 제한된 시간성을 암시한다. 생존을 향한 연약한 투쟁은 베트남 전쟁 직후 조각배에 목숨을 맡기고 탈출한 보트피플 난민들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 얀보 작가는 베트남 보트피플 난민으로 덴마크에 정착해 작업하고 있다.
피노컬렉션을 대표하는 동반자 관계의 접근 방식도 눈여겨봐야 한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서 마주하는 웰컴 룸에 전시된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의 작품들은 작가와의 장기적인 협력관계에서 구축된 방대한 작품군을 통해 작가의 모노그래프를 선보이며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그간 아시아에서 한 번도 소개된 적 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데이비드 해먼스는 주류 미술계로의 편입을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도발적이고 비판적인 어법을 구사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6점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이어온 종이 드로잉부터 산업재료와 비디오 등을 활용한 최근작까지 작가가 오랫동안 제기해 온 질문들을 포괄적으로 제시한다. 후드를 뒤집어쓴 머리가 받침대 우에 얹어진 듯한 형태를 띤 조각작품 ‘Rubber Dread’(1989)는 바람 빠진 자전거 튜브로 땋은 가닥을 바람 빠진 농구공 위에 덮어 씌운 것이다. 자메이카에서 발흥한 종교 ‘라스타파리’ 신자들의 특징적인 머리모양인 드레드록스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천대받았던 흑인노예들의 머리카락과 17-18세기 노예범죄를 관장하던 백인 치안판사의 가발을 동시에 암시한다. 일상적인 물건들의 아상블라쥬(조합)에 뛰어난 작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겪는 비극적 역사를 참조하면서 신랄한 언어유희를 시각화한다.
오디토리움에는 영상을 주로 다루는 알바니아 출신 작가 안리 살라(Anri Sala)의 작품이 상영된다. 2022년 부르스 드 코메르스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는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1395 Days Without Red’(2011)를 재구성해 선보인다. 보스니아 전쟁 중 일어난 사라예보 포위전을 소재로 삼는 영상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광기와 희망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전달한다.
2층과 3층 전시공간에서는 2명씩 작가들을 묶어 서로 다르면서도 일맥 상통하며 공진하는 작품들을 감상하도록 했다. 투명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미리암 칸(Miriam Cahn)의 작품들과 불투명하면서도 강렬한 피터 도이그(Peter Doig)의 작품들이 어우러지고, 유령이 둥둥 떠있을 것 같은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의 뇌리에 꽂히는 작품들과 뤽 튀망(Luc Tuymans)의 스릴러 스토리 연작 같은 공허한 작품들이 마주한다. 드로잉과 이미지의 중첩으로 시간과 공간을 화면 안에 들여온 줄리 머레투( Julie Mehretu)의 표현주의적 추상화와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의 극사실적인 추상화가 한 공간에서 만나고, 루카스 아루다(Lucas Arruda)의 초월적인 이미지는 인공지능과 3D프린팅을 이용한 아니카 이(Anicka Yi)의 미래적이고 시적인 작품들과 조우한다. 이밖에 폴 타부레(Pol Taburet), 신이쳉, 리넷 이아돔 보아케 등 피노컬렉션이 선택한 젊은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제16회 송은미술대상 우수상 수상자이자, 이후 2021년에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던 염지혜(Ji Hye Yeom)의 2020년 작품도 이번 전시에서 함께 선보인다. 문어의 지능이 더욱 진화해 "문공지능”을 만들고, 우리의 시공간을 방문해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지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탐색해 본 영상작품이다. 로비 라운지와 2층 창문에는 생명의 유한성을 탐구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s-Torres)의 조명 설치작업을, 2층 라운지 구석에서는 영국의 개념미술가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검은 생쥐를 볼 수 있다. 갠더의 생쥐는 모두 3가지로 흰색은 파리 부르스드코메르스에, 고동색은 베니스 팔라초 그라시에 있고 서울에는 검은 생쥐가 와서 알 수 없는 말을 종알거린다.
송은 지하공간에선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의 신비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설치 작품 <Opera (QM. 15)>(2016)를 볼 수 있다. 작가는 신화적인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의 마지막 무대에서 입었던 붉은 드레스를 입고 마리아 칼라스가 전성기 때 녹음한 오페라 아리아들 립 싱크로 부르는 것을 홀로그램으로 볼 수 있다. 붉은 옷을 입고 노래하는 칼라스는 은퇴시기와 전성기의 시간차를 뛰어넘은 유령처럼 보이고, 관람객들은 강렬한 시간적·시각적 혼란의 순간으로 빠져드는 궁극의 경험하게 된다. 파리 부르스드 코메르스에서는 2층의 밀폐된 전시실에 작품을 설치해 몰입감을 있었지만 좀 답답했던 반면 건축가 헤르초크&드 뫼롱이 설계한 송은 건물에서는 지하 공간의 물방울 모양 천창을 타고 로비 공간까지 소리가 울려 퍼져 훨씬 개방감이 있어서 좋다.
현대미술의 컬렉션만 하는 것이 아닌 후원자로서 피노의 예술적 지향성을 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시각 예술, 영화, 음악을 포함한 다양한 예술 분야의 여러 아티스트를 지원해 온 생 로랑이 공식 후원사로 함께 한다. 전시는 무료이지만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예약 후 관람이 가능하다.
이 글은 컬처램프에서 작품 사진과 함께 좀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