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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쓰는맘 Oct 20. 2020

안동 이야기 (1) 아버지의 안동

도산서원의 가을. 다음 안동이야기의 예고편 정도 되는 사진

아버지는 안동 출신이다.

순흥  , 문성공파 31대손

아버지는 전쟁통에 청상과부가  진성이가의 어머니에게 
유복자나 다름없이 태어난 31녀의 막둥이였다.

뼈대며 가문이며 유달리 강조한 것은
없는 집이었기 때문인  같다는 엄마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아버지는 가난한 집의 아버지 없는 막둥이였다.

할머니는 내가 고등학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삼베 한복에 은비녀를 꼽고 쪽을 지고 계셨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한방에 모르는 남자가 들어오면
고개를 숙이고 말씀을 아끼시는
천상 옛날 사람이었다.

나는 엄청난 양반집 자손이야
라는 말을 버릇처럼 되내이셨다.

안동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진성이가의 자손인데
할머니네 친정도 전쟁통에 재산을 잃고
시집을 왔더 랜다.

당시에 시어머니도 존대를 하셨다고
그만큼 대단한 가문의 자손이셨단다.

일면식 없이 시집을  첫날밤
남편얼굴을 보고
그렇게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미쳐 마지막 아이의 돌도 오기 전에
전쟁통에 남편을 여였다.

엄마가 시집을 와서 시댁에 왔더니
밥상에 숟가락만 있더란다.
놀라 물으니 
여자가 밥상머리에서 무슨 젓가락 질이냐 
도시 껏이  할줄 알겠냐 핀잔을 주더란다.
그렇게 결혼생활 내내 ‘도시껏 향한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이어졌더랬다.

여기까지가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안동에 곧잘 갔었다.

 아버지가 부지런히 일해서 과수원을 일구고 
커다란 사과창고도 짓고
마을 이장도 하면서 
 아버지의 집은 자꾸 신식으로 변했다.
고택체험에서나 보던 나무로  들마루에 양쪽에 방이 있는 한옥 집을 가려면
비포장 도로길을 무삼히 달려 들어가야 했다.

엄마는 처음에 시집을 가서 아버지와 기차를 타고 
버스를 두어번 갈아타고
산길을 따라 들어가다
자기 집이  끝에 보이면
아이 둘에 짐까지 이고 들고 가던 아버지가
길바닥에 짐이며 아이들을  팽겨치고
뒷짐을 지고 내쳐가더라며
아이를 이고들고 짐을 이고지고 가면서
도시껏 괜히 이런 산꼴짜기까지 들어왔다고
한탄을 했더란다.

처음으로 승용차를 사고 
금의환향한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끌고 끌고 
산길을 밟아 할머니네로 향했다.
바퀴가 산길에 빠져
차를 밀기도 수십번,
한번은 고라니를 쳐서
엄마와 아빠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산길에서 오도카니 몇시간을 있기도 했댔다.

산골짜기에 집이 네채.
다시 산을 넘으면 집이 몇채,
이런 식의 마을인데 
모두가 친척이라고 했다.
모두 순흥 안가.

不事二君(불사이군).
충신은  임금을 모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지킨 순흥안가들
단종복위를 주장하며 올린 상소문에 
이름을 대거 올린 순흥안가 유생들이
세조에게  죽음을 당하며 
안동으로 도망을  집성촌을 이룬 곳에서
아버지는 낳고 자랐다.

마을안의   집도 모두  .
다시 산을 넘어가서 만나는 집도
모두  씨성을 가진 사람들.
아재의 아재에 아재라는  아재들은
명절이면 꼬깃꼬깃접힌 천원짜리를 손에 쥐어주곤했다.
재를 넘어가며 인사를 하고나면
천원짜리로만 2만원이 넘곤했다.

거짓말 같은  야기들은 모두 나의 이야기

초등학교   할머니네 마당에는 우물과 펌프가 있었다.
아궁이에 밤을 집어 던졌다가
 하고 튀는 소리에
큰아버지가  소리로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살아있는 아버지의 고향 안동을 다시 찾은 것은
 아이가 6, 둘째가 3 때였다.

맘모스 빵집에 가고
헛제사 밥을 먹고 한식대첩에 나갔다는 

명인의 집에서
민물매운탕도 먹고
하회탈춤도 보고 
월령교도 보고
학가산 온천에서 온천을 마치고
늘어지게 잠든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오면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  안동에 왔어요.”
안동이라는 단어만에도 아버지는 ‘진짜하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전화기 너머 묵묵한 침묵 뒤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50 넘은 나이에도 돌아가신 어머니 상가에서
 놓아 울어
우리 막둥이 우짜노라는 말을 수태 들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안동에도 그렇게 울려 하셨다.

나에게 안동은 그런 곳이다.

그리고 올해 가을 아이들을 데리고 
 번째 안동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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