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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쓰는맘 Oct 23. 2020

안동이야기 (2)천원짜리 뒷면에 앉아계신 퇴계 이황

다시 찾은 안동은 코로나 한복판에서였다.
가을여행으로 단풍을
경치를 바다를 선택하는 사람들로
강원도 가는 길이 복작이니
‘우리는 안동을 가자’
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출발했다.

5년간 멤버를 조절하며
유명하다는 선생님을 매달 만나 진행해온
역사수업 보다
설민석 선생님과 ‘선을 넘는 녀석들’로
역사를 배운 아이에게
나의 역사, 나의 안동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었다.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국도는
지나가는 차를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한산했다.
코로나에도 가을 절경에 행랑객이 절정이라는데
안동을 찾는이는 많이 없는 모양이라며
도산서원으로 들어섰다.

QR체크인을 하고 체온을 재고
소독기에 들어가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서야
해설사 요청이 생각났다.
다시 나와 해설사분에게
가족네명이 해설을 듣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5분 후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자고 하시곤
고운 양산에 하늘하늘한 해설사분이 나오셨다.

다른 해설사분들은 한복을 입고 목에
삼성 목걸이 같은 태그도 걸고 계셨는데
우리 해설사 분은 뭐랄까
‘예쁘셨다’
카키색 딱 붙는 야상을 입고 스카프를 둘러맨 현대적인 모습에
안동...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이황 선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양산으로 해를 가리며 도산서원 입구까지 들어오신 해설사분은
도산서원 앞 호수를 마주한 벤치로 우리를 이끌었다.
가장 중앙의 벤치에 앉아계신 중년 여성들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씀을 하시더니
이내 그 여성분들이 자리를 내어주셨다.
‘아는 분들인가’했던 내 생각과 해설사 분에 대한 내 생각은
해설사 분의 첫 마디에서 깨졌다.

‘호수가 예쁘지요. 그런데 이 호수가 예쁘지만은 안아요.
안동댐이 생기면서 마을이 수몰되고 
도산서원으로 들어오는 길이 이렇게 호수가 돼 버렸어요.
우리 도산서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전경을 좀 보고 가요.“

이어진 얘기는 전경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본래 과거시험은 한양에서만 봤어요.
그런데 지방에서 유일하게 대과시험을 봤다고 해요.
정조 임금이 퇴계 이황의 제사를 올리라고 하면서 몸소
제문을 지어 보냈다고 해요.
매번 서울에서만 보다가 지방에서 시험을 치르니 얼마나
유생들이 많이 왔겠어요.
서원 앞에서 시험을 쳤어야 하는데 만명이 넘는 선비가
시험을 보러 왔데요.
그래서 시험을 볼 장소가 마땅치 않으니
지금 호수로 보이는 이곳이 그 때는 소나무 숲이었데요.
그 소나무 숲은 안동댐이 생기면서 물속에 잠겼어요.
그런데 이 시험을 기념하려고 시사단을 지었어요.
마주 보이는 저 인공섬에 시사단이 있어요.“

시사단이라는 단어를 말할때는 유독 사투리 억양이 튀어나와
시사단이라는 말이 더욱 기억에 남은 우리는 
해설사 선생님의 권유대로
한참을 벤치에서 시사단을 바라봤다.
멀리서 시험을 보려고 
하늘같은 임금이 내린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는
존경하는 이황선생의 서원을 마주보며
유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열망이 잠겨있는 호수는 녹조로 심하게 
초록얼룩이 지어져있었다.
“녹조가 심해요. 냄새가 많이 나죠.”
아 사대강때문인가보다.하는 내 혼잣말에
격하게 ‘사대강하고는 무관합니다.’
정색하신 해설사님은 (아뿔사 TK 지역인가)
천원짜리를 꺼내 보라고 하셨다.
천원짜리를 사진으로 찍어보라고 하시곤
“천원짜리 뒷면은 보신적 잘 없지요.
뒷면에 이곳이 도산서원이에요.
보시면 지금은 수목 됐지만 산세가 이어져 도산서원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거의 비슷합니다.
진경산수화라서 모습이 비슷하지요.
근데 자세히 보시면 도산서원 안쪽에 서당 창문에
누가 앉아계세요.“

맙소사~ 소름이 쫙 끼쳤다.
정말 누가 앉아있다.
자세히 보니 영락없이 책을 읽는 양반의 모양새다.
맙소사.
퇴계 이황선생이시다.
“맞습니다. 이황선생이세요.
겸재 정선 선생의 그림입니다.“
천원짜리로 전락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아름다운 도산서원의 전경을
거기에 이황선생이 앉아 공부하는 모습까지 그려낸
그의 위트가 
천원에 더해진 것이다.
국민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천원짜리.
돈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됐을 때부터
무삼 만지고 지니고 있는 천원
국민에게 가장 애용되는 천원에 이황선생이 앉아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은 아닐까.

조선의 대유학자
관직을 거절하고 거절해도 계속 왕의 부름을 받았다는 
퇴계 이황은 율곡 이이와 류성룡이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과는 달리
30대 중반에야 대과에 급제했다고 한다.
유명한 신하로 이름을 날리지만 
그의 진가는 실제로 은퇴 후 이뤄졌다고 한다.
60세에서 70세 사이에 저술활동을 이어나갔다니
그야말로 대기만성형이 아닐 수 없다.

이 퇴계이황이 
은퇴후 고향에 내려와 지은
도산서원
서당 서까래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두어
지어냈다는 그 서원.
이제 그 서원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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