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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고무 Dec 05. 2019

썩어가는 것들은 기쁘다

다시 태어나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오랫동안 숙성시키는 기술을 배우고 싶어. 치즈나 술, 건조육과 과일 절임 같은 것들. 깜깜한 방 안에서 눅눅한 시간의 냄새를 맡으며 천천히 같이 썩어가는 거지. 조용히 삭아가는 그 기쁨을 이해하면서.

출처: jasperhill farm 홈페이지


◼︎ 

기분은 언제나 빠르게 처분되는 일회용짜리였다. 어떤 감정이든 쉽게 수습하고, 다시 새롭게 대체하는 방식으로 이동해왔다. 슬픈 건 빨리 잊어버리고, 기쁜 것들은 알아서 너무 쉽게 사라졌다. 기쁨이 사라진 자리는 새로운 기쁨을 찾아서 또 메꿔야 했다. 공백은 불안하니까. 하고 싶은 것들도 많아서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봉합하기 위해 애썼다. 그 사이에 누워있는 기분이 싫었다.

 

그래도 시를 참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말이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동안 너무 행복하고, 그렇게 쓰고 싶어서, 또 그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꽤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지 내가 쓴 시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만든 기성품 인형 같았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고, 호흡도 없었다. 그런 것들은 절대 썩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죽어있지만 죽지 못하는 것들. 그래서 모두 버렸다.


◼︎

선생님은 무언가를 적고 계셨다. 인터뷰 전에 잠깐 정리 좀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뒤 종이 위에 계속 무언가를 끄적였다. 나는 집중하고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적으시다가 잠깐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하며 골몰한다. 다시 열심히 무언가를 종이에 끄적이다가, 손으로 턱을 괴고 잠깐 생각한다. 선생님이 종이 위에 뭔가를 쓰실 때마다 연필이 종이 위에서 쓱쓱 움직이는 소리가 방 안을 아늑하게 채운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몰입의 기쁨을. 단어와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어, 하나의 문맥이 형성되고 그 흐름을 타는 그 기분이 얼마나 고요한 흥분을 만들어내는지 아주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몸이 얼마나 많은 감각의 향연 속으로 들어가는지 말이다.


문장이 하는 일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문장 안에 들어갔을 때 그것들이 나를 의식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그러나 대담하게 움직이며 문장이 문장을 불러내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선생님, 그 기분은 얼마나 황홀한지요.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많은 것들이 시간과 함께 까만 방에서 삭은 뒤에, 그래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  만날 수 있는 기쁨이겠죠.


가끔은 아주 오래전에 버렸던 그 문장들이 또 다른 글 속에 나타난다. 조금씩 다른 얼굴로, 다른 기분으로, 다른 이야기로. 내가 버린 그 문장들이 어디선가 조금씩 호흡하며 썩어가고 있었던 걸까.



◼︎

누구에게나 어둡고 눅눅한 시간의 방은 있고, 거기에는 우리가 만든 아주 큰 오크통이 수십 개 혹은 수천 개씩 있고, 5년 뒤, 혹은 10년 뒤에 그것을 열면 어떤 형태의, 어떤 맛이 나타날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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