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파, 그 천상의 화원
야생화 탐사 셋째 날. 이번 백두산 여정에서 가장 기대되는 날이다. 이 탐사를 위해 우리는 백두산 바로 아래 운동원촌에서 숙박을 했다. 차량으로 20분이면 북파 천문봉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허락한다면 천지의 일출도 볼 수 있으리라.
우리는 일정에 따라 오전 3시에 숙박지를 출발했다. 미니버스가 어둠을 뚫고 지그재그 경사길을 오르는 동안 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아주 특별한 여정이라서 우리 말고 다른 차량은 도로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텅 빈 천문봉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어둠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우리가 타고 있는 미니버스가 아주 심하게 흔들려서 전복될까 불안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도 일출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버스 안에서 대기하는 동안 30여분이 흘러갔다. 미명이 시작되었는데도 바람은 멈추지 않았고 구름이 드리워져서 일출감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버스는 구불구불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 야생화 탐사지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첫 번째 탐사장소인 해발 2500미터 지점에서 하차를 했다. 7월 19일, 새벽 3시 45분, 해발 2500미터의 한여름 새벽공기는 분명 겨울이었다. 고어텍스 재킷을 준비해 입고 있었지만 영상 5도의 새벽공기와 거센 바람에 내 몸은 움츠려 들었다. 하지만 도로 옆 산비탈로 오르자마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미명과 안갯속에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우리의 넋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추위는 더 이상 감각의 대상이 아니었다.
눈이 닿는 데까지 펼쳐져 있는 자주색과 노란색, 그리고 연자주색, 미색, 흰색, 보라색, 분홍색, 파란색,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또 노란색, 또 흰색, 그리고 바닥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두툼한 초록색... 아니 초록 물감... 온갖 천연색 물감들이 최고의 조화를 이루며 내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거대한 자연 팔레트였다. 각기 개성 있는 색깔들이 저마다 필요한 만큼의 공간을 차지하며 함께 어우러진 그 모습은 자연의 팔레트가 만들어내는 색의 향연 그 자체였다.
잠시 놓고 있었던 정신줄을 되잡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팔레트 물감 하나하나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희귀종 야생화들이었다. 구름송이풀, 두메양귀비, 두메자운, 호범꼬리, 씨범꼬리, 구름범의귀, 나도개미자리, 돌꽃, 좁은잎돌꽃, 나도황기, 두메분취, 천지괭이눈... 정신이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자 손가락 끝에 와닿는 추위를 느꼈지만 우리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바빴다. 우리 조의 야생화 안내자를 가능한 가까이 따라다니며 눈에 보이는 물감들을 정신없이 사진에 담았다. 안개와 바람이 여전히 꽃밭을 관할하고 있었고 추위가 내 손가락을 마비시켜서 꽃들은 물감이 되었다 다시 꽃이 되었다를 반복하는 듯했다. 꽃이든 물감이든 일단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카메라에 담고 볼 일이었다.
온갖 야생화들이 카펫을 이루며 지상을 수놓고 있어서 발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사실상 조심은 했지만 나도 모르게 짓밟고 지나온 꽃들을 보면서 그곳에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남겨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야생화 천국을 누비는 사이 일행들의 탄성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구름 사이로 아침햇살이 찬란히 비쳐 나오고 있는 게 아닌가?
천지의 일출은 못 봤지만 백두산 2500미터 고지대에서 새 아침햇살을 맞이하는 건 감동 그 자체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아침햇살을 사진에 담은 시각은 새벽 4시 20분. 보통 단잠을 자고 있을 그 시간에, 백두산 야생화 카펫 위에서 구름 사이로 장엄하게 내비치는 백두산 아침햇살을 맞이하다니... 이 보다 더 큰 감동의 시간을 찾기 힘들 것이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버스에 올라 우리는 다음 탐사장소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해발 2300미터 지점이었다. 해발고도에 따라 백두산의 식생이 어떻게 다른지 관찰할 수 있도록 진행팀에서 미리 계획한 탐사장소였다.
이곳에서 나를 맞이한 첫 번째 식생은 만병초였다. 이미 개화시기가 지나서 꽃은 없고 잎만 무성했지만 서식지를 고려할 때 노랑만병초일 것이다. 설악산 대승령을 걸으면서 놓쳤던 바로 그 꽃을 여기서도 때를 못 맞춘 게 이내 아쉬웠지만 자연은 순리에 따르는 법이니 오로지 내 탓이다. (은퇴 후의 시간을 약속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얻은 게 있었다. 설악산의 (그리고 수목원의) 만병초와는 전초의 모습이 사뭇 달랐다. 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고산의 거친 바람을 피하기 위해 납작 엎드린 모습이라고나 할까? 나 같은 어설픈 초짜들은 전혀 다른 종으로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담자리꽃나무와 콩버들 같은 다른 식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납작 엎드려 살고 있었다.
환경에 적응하는 현명한 방법일 게다. 이런 걸 우리는 진화라고 부른다. 혹자는 이것을 인간사회 현상에 섣불리 적용하려고 한다. 권력 앞에 납작 엎드려 사는 삶을 당연히 여기려 한다. 온갖 식생들의 삶의 모습을 인간의 삶과 연결 지을 수 있지만 섣부른 판단이나 적용은 금물이다. 인간(Homo sapiens)이라는 종(species) 자체가 위기에 처할 상황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곳 2300 고지에서는 햇볕이라는 조명을 충분히 활용해 식생들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었다. 진한 보라색의 하늘매발톱이 먼저 눈에 띄었다. 식물원에서는 많이 보았지만 자생지에서는 처음인데, 그 묘한 파랑 색감이 우리의 눈을 자꾸 끌어당겼다. 또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좀참꽃이라는 진달래과 식물이었다. 진달래, 꼬리진달래, 철쭉, 산철쭉, 흰참꽃나무 등 한반도에는 진달래과 식물들이 참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다. 좀참꽃은 처음 보았지만 전혀 좀스럽지 않았다. 그 분홍 색감에 매료되어 더 멋진 모델을 찾느라 언덕 위로 올라가다가 안내자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이곳 식생의 다양함도 끝이 없었다. 고산봄맞이, 산석송, 가솔송(열매), 콩버들, 두메투구꽃, 숙은꽃장포, 담자리꽃나무, 구름국화, 두메분취, 둥근바위솔, 산각시취, 바위구절초, 등대시호... 감탄의 연속이었다. 그 외에도 2500 고지와 겹치는 꽃들도 많았다. 두메양귀비, 구름범의귀, 돌꽃, 좁은잎돌꽃, 호범꼬리, 씨범꼬리, 구름송이풀, 두메자운 등, 서식 조건의 범위가 넓은 꽃들이라 볼 수 있겠다.
백두산 북파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탐사지는 해발 2100미터 고지의 "흑풍구(黑風口)"였다. 이름으로 보아 아마도 바람이 거세게 몰아붙이는 곳으로 생각된다. 비가 내리면 물길이 형성되는 장소로 보이는데 주변에 다양한 야생화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띈 건 가는다리장구채! 한국에서는 설악산 대청봉에서나 보았던 꽃이 지천으로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오랑캐장구채가 함께 어우러진다. 그 밖에도 긴개싱아, 고본(이거나 개회향), 두메분취, 산각시취, 둥근바위솔, 그리고 이곳에서 최고의 색감을 발휘하고 있는 바위구절초까지 맘껏 그리고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야생화를 따라 흑풍구를 위로 위로 오르다 보니 눈앞에 또 하나의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장백폭포(비룡폭포)였다! 멋지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저 멀리 보이는데, 그 앞에 가는다리장구채와 두메분취와 두메양귀비가 멋진 자태를 취하고 있다.
우리 멋지죠? 가장 아름답게 우리 모두를 담아 주세요! 그들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나도 모르게 재해석을 했다. 우리를 지켜 주세요! 우리가 멋진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도중에 차를 멈춰 멀찌감치 바라다보이는 소천지를 담고 숙소로 돌아오는 중에도 그들의 소리가 계속 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