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백폭포와 소천지 숲길
백두산 북파 탐사를 마치고 운동원촌 숙소로 되돌아온 시각은 오전 6시 30분. 조찬이 준비되는 동안 운동원촌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자주꽃방망이가 먼저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는 때를 잘 맞춰 태백 대덕산에나 가야 볼 수 있었던 꽃이다. 바로 옆에는 곰취처럼 생겼으나 키가 크고 꽃차례가 늘씬한 노란 꽃이 도열해 있었는데 처음 보는 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리곤달비라고 했다. 그 밖에도 어수리인 줄 알았는데 잎이 좁아서 구분되는 좁은잎어수리, 산꿩의다리 같았는데 나중에 묏꿩의다리로 추정한 식물, 키는 큰데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도깨비엉겅퀴(도깨비는 참 얌전한 존재인가 보다), 꽃쥐손이 등이 한 곳에서 쉽게 관찰되었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다시 셔틀버스에 올라 다음 일정을 시작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장백폭포(비룡폭포)였다. 야생화탐사라기보다 어슬렁어슬렁 여유 있는 관광의 시간으로 여겨졌다. 버스에서 하차하니 예상대로 많은 관광객들이 떠들썩하게 유람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은 U자 모양의 협곡을 따라 위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협곡 가운데로 물살이 거친 개울이 흐르고 있었는데 멀리 시야가 닿는 곳에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고 있는 게 아닌가? 노상 온천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두어 사람이 무언가를 박스 모양의 들것에 담아 나르고 있었다. 온천물에 삶은 계란이었다. 온천의 수온이 섭씨 40도가량이 된다고 했다.
데크길을 따라 오르면서 꽃쟁이답게 우리는 주변의 야생화들에 계속 눈길을 주었다. 노란색 꽃들이 여기저기 도열해 있었다. 숙소 주변에서 이미 보았던 어리곤달비 군락과 처음 마주하는 진한 노랑빛의 금매화 무리들, 그리고 멀리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앞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는 사스래나무 군락지, 그리고 흰색 꽃을 달고 꺽다리처럼 여기저기 서있는 박새 군락지도 보였다.
야생화를 관찰해 가며 조금 가파른 계단을 올라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한 마디로 감탄 그 자체였다. 확 트인 넓은 협곡 가운데에서 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그 양쪽에는 거대한 암벽 봉우리 두 개가 우뚝 솟아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었다. 새벽에 흑풍구에서 멀리 바라다보았던 그 장백폭포를 바로 눈앞에서 맞닥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지도를 펼쳐놓고 보니 좌측 수문장은 천문봉이고 우측 수문장은 용문봉이었고, 천지의 물이 달문을 거쳐 그 사이로 힘차게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천지 물의 70%는 지하에서 솟아올라 채워진다고 하니 적어도 그때그때 솟아나는 만큼의 수량이 이 폭포를 타고 내려와 협곡으로 흘러가고 있는 게 아닌가?
모두들 이 장엄하고 시원한 광경을 사진과 비디오로 담고 서로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우리 팀은 단체사진을 찍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워했다. 몇몇은 손으로 폭포물을 받아내는 장면을, 또 몇몇은 입을 벌려서 폭포물을 받아마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탐사팀의 연령대는 대부분 50대, 60대, 70였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10대나 20대와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보였다. 이전에는 이곳에서 폭포 위쪽으로 난 터널길을 통해 천지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거금을 지출해야만 허용이 된다고 한다. (언젠가 여행비용을 두둑이 준비해서 그 길을 걷고 싶어졌다.)
장백폭포 감상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한 후 우리의 눈길은 다시 야생화로 향했다. 장백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옆에 두메양귀비와 바위구절초가 몇 개체 관찰되었고, 주차장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에서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들"이 눈에 띄었다. 선이질풀, 질경이택사, 큰산좁쌀풀, 돌바늘꽃, 개황기, 그리고 다른 투구꽃과는 색감과 자태가 완연히 달라 보였던 각시투구꽃!
주차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곧바로 개울을 건너서 소천지로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야생화탐사를 이어갔다. 개울 옆을 따라 이어지는 야생화탐방로는 데크길로 잘 조성되어 있었고 수많은 야생화가 여기저기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야생화 군락은 어리곤달비였다. 실개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습지에 그들은 밭을 이루고 있었다. 곧이어 각시투구꽃 군락이 맑은 실개천 가장자리에 깔끔하고 화사한 모습으로 멋진 반영을 드리우며 우리를 반겼다. 한국에서는 만나보지 못했던 투구꽃 종류로, 잎이 잘게 갈라지고 꽃은 밝은 보라색을 띠고 있어서 이름에 '각시'라는 접두어가 붙은 이유가 쉽게 납득이 갔다.
데크길에는 눈개승마 꽃이 많이 눈에 띄었다. 눈개승마 꽃타래는 누런 모습과 연녹색 모습이 함께 관찰되었다. 동행하신 야생화 선배님의 설명에 따르면, 수정이 이루어진 후 눈개승마 수꽃은 누렇게 변해서 떨어져 버리고 암꽃은 더 오래 남아서 연녹색 열매들을 살찌운다고 한다. 은퇴할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은 "수컷"으로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우울 모드로 빠져들려는 순간, 진노랑 금매화 무리가 햇볕을 받아 더 샛노란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참 고마웠다. 보기만 해도 기분을 고조시키는 색감이다. 바로 옆에는 신비스러운 파랑의 하늘매발톱이 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개승마 수꽃이 끌어내렸던 내 기분은 순식간에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하늘매발톱이 자리 잡고 있었던 큰 바위의 경사면에는 설앵초와 구름범의귀가 함께 어우러져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다. 설앵초(또는 좀설앵초)는 이미 꽃이 진 모습이라서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동정이 가능했다. 또한, 바위경사면에 자리 잡은 구름범의귀는 백두산 북파의 고지대에서 본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전혀 다른 식물로 보일 정도였다. 바위 경사면의 구름범의귀는 키도 크고 근생엽(뿌리잎)의 모양도 또렷이 남아 있었고 측면에서 보는 꽃차례는 그 구조를 섬세히 드러내 보였다. 고지대 구름범의귀와 바위경사면 구름범의귀 모습은 에펠탑을 상공에서 내려다봤을 때와 지상에서 올려봤을 때의 차이라고나 할까? 자연현상이든 사회현상이든 모든 현상들을 대할 때 다양한 시각으로 봐야 함을 일깨워 주는 듯했다.
숲길을 한 시간여 걷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소천지에 도달해 있었다. 흑풍구 조금 아래 도로변에서 멀리 내려다보며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소천지는 초라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중국정부의 난개발로 수량이 줄어 들어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보존과 개발의 균형이 절실함을 다시 깨닫는다. 호수를 벗어나 다시 숲길로 접어드는 순간 코발트색 군락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비로용담이었다!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한국에서는 대암산 용늪에서나 관찰할 수 있다는, 그것도 망원렌즈가 없이는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바로 그 비로용담 무리가 데크길 바로 옆에서 우리를 확 끌어당겼다. 너나 할 것 없이 펜스를 넘어 진한 코발트색의 환각에 빠져 들었다. 이 묘한 코발트색의 파장은 우리의 정신만 끌어당기는 게 아니라 카메라의 CPU 마저도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듯했다. 정신없이 많은 샷을 날렸지만 모양과 색감이 제대로 표출된 게 몇 개 없었다. 시간을 잊고 코발트색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안내자는 다음 장소로 우리를 재촉했다.
머릿속은 비로용담의 코발트색 파장에 여전히 점령된 상태로 5분여를 걸었을까? 미리 앞서 갔던 우리 팀의 야생화 리더가 저쪽에서 흥분된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시황의 불로초 중 하나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야생화 탐사인생에서 본 것 중 가장 개체가 많고 온전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게 뭘 말하는지 몰랐지만,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 두세 명씩 조를 이뤄서 기다리다가 그 불로초를 알현하러 조심조심 거친 숲으로 들어갔다. 햐아~ 야생화 리더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신기한 식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밝은 갈색과 노란색이 켜켜이 어우러진 길쭉한 솔방울 모양의 식물이었다. 네 개의 개체가 같은 지점에 뿌리를 박고 건강한 모습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주변에는 진초록의 만병초가 이 "불로초"를 에워싸고 있다. 정식이름은 오리나무더부살이라는 부생식물이었다. 이 식물이 불로초라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보는 대로 채취를 해가서 보기가 더욱 힘들어진다고 했다. 나는 이 식물체의 모습을 한동안 감상한 후에 정신없이 사진에 담았다. 그 색감과 모양을 최대한 잘 담으려고 애썼지만 차례를 기다리는 팀원들을 생각해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데크길로 돌아와서는 다시 주변의 야생화들을 살폈다. 구름패랭이꽃(술패랭이꽃으로 통합되었다는)이 여기저기서 많이 눈에 띄었다. 장백폭포를 거쳐서 숲 데크길 옆으로 계속 흘러온 천지의 물은 우리의 소천지 여정이 끝나갈 무렵엔 폭포 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물길은 숲을 거치며 자꾸 좁아져서는 이제 숲 바닥의 암반을 뚫고 형성된 폭 1-2미터, 깊이 3-5미터의 수로를 따라 좌우로 방향을 틀며 소리쳐 흐르고 있었다. 야생화만 보지 말고 천지에서 흘러온 우리 물길도 봐주세요,라고 외치는 듯했다. 데크길 중간중간 추락위험 주의문구가 눈에 띄었고 그 거친 물길을 조망할 수 있는 작은 조망터도 여기저기 만들어져 있었다. 지질학자가 아니라서 좁고 깊고 위험한 이 물길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백두산 화산활동이 왕성할 때 마그마가 암반을 녹이며 흘러가서 만들어진 길인지, 천지 폭포의 물길이 숲을 지나며 좁아져 침식작용을 일으켜 생겨난 길인지... 소천지의 야생화 탐방로는 이 거친 물길이 넓어져서 더 이상 거친 소리를 내지 않는 지점에서 끝이 났다. 하지만, 어리곤달비, 각시투구꽃, 하늘매발톱, 비로용담, 오리나무더부살이 등 그곳을 거처로 삼고 있는 야생화들의 신비스러운 형태와 색감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