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원룸에서의 생활은 내게 심리를 투영하는 거울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겨우 네 평 남짓한 공간에 나의 물건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나름의 질서를 찾아갔다. 모든 물건은 정해진 자리에 놓였고, 방은 언제나 정돈된 상태를 유지했다.
이 작은 공간은 마치 내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평온하고 충만할 때 방은 온전한 모습을 유지했으나, 마음이 흐트러질 때 방 또한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방을 바라보며 내 내면의 상태를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가량 방을 난장판으로 방치하면, 주말이 다가와 나는 마치 명상을 하듯 대청소를 시작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흩어진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면서 마음속 혼란도 조금씩 내려놓았다. 방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으면 나도 평온을 되찾았다. 이 과정은 나에게 내면을 정화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방을 정리하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는 마음의 연습과도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동네로 이사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이전보다 1.5배 넓어진 방에 짐을 정리하고 나니 공간이 휑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어딘가 공허한 느낌이 들었다. 방을 어질러도 티가 나지 않았고, 더 이상 방을 통해 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내면의 혼란과 피로는 점점 쌓여 갔지만, 이를 반영해 줄 공간은 사라져 버렸다. 넓어진 공간은 내 내면의 혼란을 감추기에 충분했다.
이 넓어진 방은 더 이상 내 상태를 비추지 않았고, 나는 내가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깨닫기 어려워졌다. 방을 아무리 어질러도 이전처럼 흔적이 남지 않았다. 내면의 고통은 점차 쌓여갔고,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한 채 나는 덤덤히 버텨냈다. 어느 날, 바닥에 주저앉아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고, 눈물이 흘렀다. 그 공허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중, 과거에 친한 언니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언니와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혼이란 무엇인지, 타인과 마음을 나누고 다시 돌아와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나는 결혼에 대해 특별한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미래의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일하는 모습이 보였고, 집안일이나 결혼식 같은 일들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때로는 두렵기도 하고, 나의 시간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외로움이 많은 사람 같아. 시기는 몰라도, 결혼은 꼭 할 거라고 괜한 확신이 드네."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무엇인가 걸렸다. 내가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 결혼이라는 형태인지, 아니면 내가 외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 외로움을 인정하기 두려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방의 상태를 보며 나 자신을 판단하던 습관처럼, 나는 나의 감정들을 투명하게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마음을 열어주고,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것은 어렵고도 불안한 일이었다.
그 불안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더 큰 고립감을 느꼈고, 내 마음속에는 처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마치 쓰레기처럼 쌓여 갔다. 작은 방에서는 그 감정들이 금세 눈에 띄었지만, 넓어진 공간에서는 감정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졌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면의 쓰레기통은 점점 무거워졌고, 나는 이제 그것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외로움은 내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저 내 안의 무거운 감정들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어딘가에 숨겨두지 않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넓어진 방에서의 생활, 혼돈에서 다시 질서로, 그리고 다시 공허로 이어지는 이 여정 속에서 나는 내면의 고요함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외로움을 피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그런 감정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나를 모르겠고, 그저 그 혼란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