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레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sity Sep 15. 2019

우리 모두 작은 영웅이 있었다.

새벽 감성 백 퍼센트

우리 모두 각자의 영웅들이 있었다. 해적을 꿈꾸는 소년이라던가, 정의에 따라 악당을 처단하는 세일러문이라던가. 나에게도 세 명의 영웅이 있었다. 말괄량이 삐삐 롱스타킹, 엽기 과학자 프래니, 그리고 나의 영원한 모험가 도라도라. 나는 내 작은 영웅들을 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지금은 어린 시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겪을 수 있으니까. 이들을 다시 기억하게 된 건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나서였다. 인사이드 아웃에 관한 얘기는 마지막에 하고, 지금부터는 내 유년시절을 책임졌던 영웅 3명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엽기 과학자 프래니


어느 날 우연히 들른 온라인 서점에서 눈에 띈 것은, 엽기 과학자 프래니 8번째 책이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익숙한 보라색, 오묘한 미소, 알 수 없는 표정의 여자아이. 아, 프래니. 어렸을 때 참 많이 좋아했다. 프래니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예뻐지려고 노력하지도, 착한 아이로 보이려 애쓰지도 않았다. 어린이는 괴상하거나 미치면 안 될까? 똑똑하고 올바른 아이가 되기 어려웠던 내게 프래니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Franny K. Stein Mad Scientist by jim benton


프래니는 프래니다웠다. 궁금한 건 못 참는 호기심 대마왕이었고, 만들고 싶은 건 꼭 만들어 보는 근성 있는 아이였다. 여자 아이는 조신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에 의문을 던지고, 엽기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내는 아이였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을 미워하는 대신, 자신이 만든 발명품을 선물하는 기특한 아이였다. (물론 그 선물이 부모님에게 쓸모 있는 건 아니었다)


프래니는 자신이 만든 엽기 괴물이 마을에서 말썽을 부리자, 프래니는 조수인 이고르와 함께 괴물을 무찌른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과한다. 프래니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알았다. 어쩌면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웠달까.



<엽기 과학자 프래니>는 아이를 위한 동화지만, 어른이 봐도 충분히 의미 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것, 우리 어른들이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아닐까. 내 책장에는 지금도 프래니 시리즈가 꽂혀 있다.




#자유로운 아이, 삐삐 롱스타킹


©Astrid Lindgren Company


프래니 못지않은 매력을 가진 영웅이 또 있다. 바로 삐삐 롱스타킹. 상상력의 한계가 없는 친구이자, 힘도 무척 센 아이다. 삐삐 롱스타킹이 출간된 당시, 스웨덴 사회는 '어린이란 자고로 단정하고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통념이 만연했다. 하지만 삐삐는 이사 온 첫날부터 그 생각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아빠 구두를 신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가 하면, 가족 없이 조그만 원숭이와 함께 살고, 학교에는 찾아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에 어른들은 기겁하며 삐삐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려고 하지만, 삐삐의 입담과 힘은 오히려 그들을 넘어선다.


‘‘Come in or stay where you are, it’s entirely up to you,’ called Pippi. ‘I never force anyone!’’


©Astrid Lindgren Company


어렸을 적에 나는 삐삐를 동경했다. 커다란 말 한 마리를 들어 올리는 건 일도 아닐 만큼 힘이 세고, 집안에는 금화가 궤짝으로 쌓여 있고,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하는 어른도 없어 부러웠다. 내가  어른이 된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으로 그녀를 동경한다. 사실 삐삐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버릇없는 골칫덩어리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어른들은 그녀를 예의 없는 아이로 보지만, 사실 삐삐는 다듬지 않은 원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다.


삐삐는 구구단을 외우거나 글씨를 제대로 쓰는 법은 모르지만, 좋은 것이 생기면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안다. 사회가 강요하는 방식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삐삐는 자유분방한 아이지만, 어쩌면 어른보다도 더 많은 삶의 진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삐삐가 오랜 시간 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점 때문이 아닐까.


"If you are very strong, you must also be very kind."



#나의 영원한 모험가, 도라도라


©dora the explorer


마지막 영웅은 내 영원한 모험가, 도라도라다. 도라도라는 어린 시절 나를 대신해 모험을 떠나 주기도 했고, 영어 공부도 도와준 친구다. (도라도라는 어린이 영어 교육 프로그램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늘 모험을 꿈꿨다. 새로운 곳에 가고 싶어 했고, 낯선 경험을 좋아했다. 도라도라는 그런 내게 모험심을 일깨워준 친구다.


그때 당시 뉴스에서는 아동 납치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했다. 매일 엄마에게 낯선 사람이 다가오면 피하라는 말을 들었고, 이상한 골목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학원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야 했고, 낯선 곳에 가선 안 되는 내게 모험은 상상 속의 단어였다. 도라는 그런 나를 대신해 모험을 떠났고, 새로운 곳을 보여주거나 다양한 친구들소개했다.



도라는 항상 내게 길을 물었다(문답형 애니메이션이다).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끊어진 다리를 어떻게 연결할지 같이 고민했다. 악당 여우가 살며시 뒤를 쫓아올 땐 뒤를 돌아보라며 TV 속 도라에게 다급하게 외치곤 했다.


매주 주말 아침의 '도라도라 영어나라'는 위험천만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내가 모험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Disney


다시, 인사이드 아웃으로 돌아가 보자. 인사이드 아웃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라일리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빙봉'이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이는 라일리가 마음속 친구를 잊고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일리에게 빙봉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속 깊은 곳에도 친구이자 작은 영웅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그들을 잊고 현실을 살아가게 된 건 아닐까. 어릴 적 같이 놀며 추억을 쌓은 친구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그 사실 조차 잊게 되는 모습은 충분히 아련하고 감동적이었다.


'빙봉'이 망각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은 단순히 유아 시절의 상상이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은 살기 위해 잊고 있던 수많은 망각들을 다시금 기억시키면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빙봉의 소멸은 기쁨이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자신이 쓸모없다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모두 필요했다는 것을 말이다.



unsplash.com


어린 시절의 나는 삐삐와 프래니, 도라가 되고 싶었다. 삐삐처럼 아주 힘이 세서, 나쁜 사람들을 무찌를 수 있었으면 했다. 또 프래니처럼 당당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지낼 수 있는 프래니가 부러웠다. 어디든 자유롭게 모험을 떠나는 도라가 부러웠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3명의 작은 영웅들을 잊고 있었다.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나서야 내 유년시절을 함께해준 마음속 친구들에 대해 곱씹어보게 됐다. 우리는 어른이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기억과 감정들을 망각했을까? 그 망각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는 어쩌면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고 있진 않았을까. 이 작은 영웅들은 묻고 있다. 여러분이 잊고 있던 빙봉은 얼마나 많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매일 걷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