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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바라보는 인문적 시선

경계에서 바라보는 인문적 시선이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판단의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오해에서부터 정치인들의 말에 이르기 까지, 도대체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인지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너무 많다. 이때 필요한 것이 ‘경계에서 바라보는 인문적 시선’ 이다. 경계에 서면 이쪽 저쪽이 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경계는 구분과 차별이라는 다소 부정적 의미로 비춰지지만 심층적으로는 판단과 선택의 지혜로운 공간이다. 사전적 의미로 ‘경계(經界)’는 ‘사물이 어떠한 기준에 의하여 분간되는 한계, 지역이 구분되는 한계, 그리고 인과의 이치에 따라 스스로 받는 과보’ 등으로 정의되어 있다.
 
 경계에는 ‘분간’되고 ‘구분’되는 한계로서 어떤 기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경계는 원인과 결과라는 명제에 따라 각각이 그 ‘과보(果報) 즉, ‘인과응보’의 결말이 따라오게 됨을 함축하고 있다. 특정 사물과 사안에 대하여 어떤 기준에 따라 한계를 규명하고 구분하여 내용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것에 부합하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올바른 생각과 판단이 선행되어야 함이다. 2019년 현재 우리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엄격한 경계선이 그어져, 올바른 판단과 현명한 선택이 불가능한 혼란 그 자체의 시대 공간 속에 함몰되어 있는 것 같다. 학계에서는 21세기 창조경제 시대에 융합학문을 강조하면서 전문 분야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서로 다른 분야가 연결되어 그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각 분야를 가로질러 윤활제 역할을 할 융합인문학도 요구되어지고 있다. 스팀(STEAM)이라고 하여 과학(Science), 기술(Technology), 공학(Engineering), 예술(Arts), 그리고 수학(Mathematics)을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 한다.


 하지만, 유독 정계에서 그 경계는 허물어지거나 융합될 수 없는 것처럼 각각이 더 높은 벽을 쌓고 있다. 여·야의 정치적 언쟁은 발전적 논쟁의 차원을 넘어 투쟁적 싸움판이 되어버린 것 같다. 국회는 국민을 위한 입법기관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해 버린 것 같고, 민생관련 법안조차 시기를 놓쳐버려 경제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매월 고액의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국회의원들은 얇은 월급봉투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민들의 다급함을 못 느끼고 있다. 하나에서 열까지 상대 당의 제안이나 정책은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들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더 황당한 것은 그것들이 국민의 뜻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국민을 의식하고는 있는 것 같다.


 과연 국민의 뜻에 따라 제대로 나오는 정책이 몇 개나 되는가. 정부 여당의 소득 주도 경제정책은 오히려 소득불균형을 더 악화시키는 꼴이 되어버렸고, 주 52시간 근무와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관련 각종 규제정책들은 시장에 순간적인 충격을 주어 국가 경제의 활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부동산 문제는 이제 서울 경기를 벗어나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거기에다 코로나 까지 겹친 2020년 12월의 현 상황은 엎친데 덮친다는 표현이 그대로 들어 맞는 상황인 것 같다.


안타깝게도 경제 질서의 균형추인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권력’에서 나오는 경제정책들은 오히려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 시장의 부정적 내성을 키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그 흐름이 잡힐 수도 있다. 아니 시장은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다.  두더지 게임은 투입한 돈과 시간이 다하면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경제상황이 장기침체 국면에 들어간다면 국민들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각종 경제지수로 볼 때 경제가 새로운 후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강해짐에 따라 경기후퇴(Recession)를 의미하는 ‘R의 공포’를 넘어 일본이 겪어온 장기적 경제 불황을 의미하는 ‘J(Japanification)의 공포’까지 거론된지도 오래다. 정책적으로 발표되는 각종 경기지수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 대한 판단과 선택이 힘들고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 재창조해야 할 4차 산업혁명의 이 시대, 국가적 관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일방적 심리기제를 극복하고 한 가지 창조적 심리기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전자 두 가지 중 하나는 ‘경로의존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확증편향적 선입견’ 이다. 두 가지 다 사회심리학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경로 의존성(經路依存性, Path dependency)’은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특정 정당에 들어가게 되면 소속 정당의 주장이 잘못됐는데도 그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확증편향(確證偏向, Confirmation Bias)’은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지속하려는 성향이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확증편향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검찰 개혁관련 법무부장관과 검찰청장과의 최근 일련의 사태들은 처음에는 판단이 어려웠지만 사태 진전과정에서 많은 국민들에겐 이미 결론이 나있다고 본다. 문제는 경로 의존적 사고에 확증편향성이 잘못 결부되어 자기가 잘못하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들 두 가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바르게 실천한다면 대중은 일방적으로 한쪽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고 정책적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다. 또, 국회가 제대로 된 토론의 장이 될 것이고, 국민들에게 획일적인 편협한 정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후자의 창조적 심리기제 한 가지는 ‘역발상’의 창조적 사고이다. 역발상이란 어떤 현상이나 개념에 대해 반대로 생각하는 것으로 발상의 전환이라고도 한다. 이로 인해 추가로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한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예상치 못할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으로 창의력 훈련에 많이 활용되고 있고, 창조적 결과로 이끄는 유용한 생각법이다. 이것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미래 인공지능 시대 우리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이제 도를 넘어버린 정당의 정치 이념적 대결구도를 우리는 하루 빨리 허물어야 한다. 과연 대한민국은 지금 무엇으로 움직여지고 있을까? 디지털 뉴딜 정책으로 디지털 경제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고 있지만 디지털 기술 역시 균형 잡힌 역발상의 창조적 사고라는 인문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제대로 실현될 것임을 정책 입안자들은 알아야 한다. 


 2020년 12월 현재, 여·야는 각 정당의 경계에 서서 모든 사안들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중차 대한의 시대적 공간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의 공감을 구해야 한다. 서로 다른 ‘차이’를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식하고 넘어설 때 국가 정치의식 수준은 한층 더 고양될 것이다. 기대해도 좋을까. 그 결과는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세월은 흘러도 그 명제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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