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키티 Apr 10. 2020

당신의 최초의 기억

광화문의 4월



“인생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대학 수시 면접에서 교수가 내게 건넨 질문이다.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이 과연 나의 첫이 맞을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최초의 기억이라.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그날 거짓말을 했다. 집에 큰 어항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춤을 추다 머리를 박았고 어항은 깨졌다. 그 순간 물과 물고기들이 방안 가득 쏟아졌다. 나는 손을 사용하며 최대한 생동감 있게 설명했다. 물론 거짓말은 아니다. 내게 존재했던 사건이었으니. 하지만 나에게는 없는. 사진으로 본, 그리고 부모님으로부터 들어 알게 된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최초의 사건. 교수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최초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 이후 나는 ‘첫’에 대해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너와 처음 들은 음악, 너와 처음 가게 된 장소. 처음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유년시절을 경기도 광명시에서 보냈다. 서울과 붙어있지만, 서울에 속할 수는 없었던. 서울로 주소를 이전해 매일 다리를 건너 학교를 다녔지만, 가면 안 되는 금지 구역에 발을 디디는 사람처럼 눈치 보면서. 결국 서울로 이사 가고 나는 경기도에서 도둑처럼 학교 다니던 이에서 벗어났다.

집 근처에는 서울 중심까지 다니던 버스 노선이 몇 있었다. 740번과 60번을 타면 신세계 본점까지 가는 버스였다. 엄마는 태생이 서울 사람인 듯 나를 데리고 매 주말 서울 한복판에 데려다줬다. 명동의류 옆에 명동 돈가스가 있던 시절, 명동에 가면 엄마는 꼭 그곳에서 히레까스를 사줬다. 덕수궁 미술관 계단에 앉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줬다.

초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혼자서도 명동에 갔다. 친구들은 두려움 반 무서움반으로 나의 서울투어에 합류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그 용기는 어디서 났던 걸까. 그때부터 나는 길눈이 밝았는데, 마치 이들을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집중하고 다녔을 터다.

서울의 중심.


저녁시간이 되면 지친 어깨로 발걸음을 집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되고 싶다 생각했다. 그래서 두 번째 인턴 생활을 경희궁 근처에서 시작했을 때, 나는 그 꿈을 반쯤 이뤘다고 행복해했다. 비록 해뜨기 전에 출근해, 해가 지고 난 다음 버스에 몸을 실었고 눈을 뜨면 기적처럼 집 앞 정류장에 서있는 나를 보며 허겁지겁 내렸지만.

막연했던 꿈들이 선명해질 때마다, 나의 꿈이 보잘것없었구나 깨달으며 자괴감이 든 건 서른 즈음이었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며 인간의 끝도 없는 바닥과 그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는 잠시 방치했다.

한동안 광화문 오기를 꺼려했던 나는 몇 년 만에 그곳에 왔다. 모두의 기억 속 4월은 가슴 시린 시간이다. 2014년 4월 16일. 사무실 근처 카페에서 아침 8시부터 인터뷰를 진행했던 날이었다. 이제 막 자신의 꿈을 이룬 청년과의 패기 넘치는 인터뷰를 하고, 꼭 잘됐으면 좋겠다는 진심 가득한 응원을 건네고 사무실로 복귀했던 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바다 한가운데 멈춰있는 배 한 대가 침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떴고, 나는 다시 인터뷰를 정리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은 어디로부터 시작된 오보였다. 거짓말 같은 현실.

연예, 공연계는 모두 올 스톱. 사회 전체가 멈췄다. 방송도 모두 중단됐다. 그리고 수학여행에 가 귀에 벚꽃을 꽂고 꽃처럼 빙그르르 돌고 있을 어여쁜 이들은 이름 대신 숫자로 불리며 땅으로 돌아왔다. 어른들은 누군가에게 책임 돌리기 바빴다. 멍하니 눈물이 떨어지는데, 도통 누굴 위한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 잊을 수 없는 나의 4월 16일의 기억. 간혹 지인들과 그날을 떠올린다. 모두가 하나같이 그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안고 있었다. 그해 4월은 모두에게 혹독했다. 그리고 여전히 차가운 마음으로 버텨내는 이들도 있다. 시체 팔이하냐, 왜 아직도 저러고 있냐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다. 아프다. 타인의 슬픔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설득하고 이해시키기도 지쳐 입을 닫아버리는 나는 위선자가 되어.


광화문에 대한 최초의 기억.

종종 교보문고에 가 책을 읽었다. 훅 풍겨오는 책 냄새, 쥐색의 카펫 위에 앉아 책을 보고 있으면 몇 시간 뒤에 엄마가 돌아왔다. 그 당시 교보문고 천장은 거울이 붙어있어 책을 보다 위를 보면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는 내가 보였다. 그 작던 아이는 조금씩 조금씩 자라났다.

효선 미순 장갑차 사건 당시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광화문 교보문고 옆으로 갔다. 촛불을 들었고 옆에서 불을 붙여줬다. 촛불을 든 이들이 가는 곳으로 뒤따랐다.

“옳지 않은 것을 보았을 때,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

엄마는 나를 이곳에 두고 맨 앞줄로 나가 몸싸움을 하며 앞으로,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은 아마도 그때부터 자라난 것 같다.

이후 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기 위해 광화문에 나갔고, 대학에 가고 나서는 진보 성향의 교수님이 수업 대신 집회 현장으로 학생들을 불렀다. (다음 학기 교수님의 수업은 사라졌다.) 20대 후반에는 국정농단에 반발한 시민들이 광화문을 가득 채우며 촛불을 밝혔다.

나는 여전히 광화문을 사랑한다. 유년시절의 기억부터, 현재까지 그곳에선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달려 나가고 있다.


나는 지금 광화문 근처에서 살고 있다. 집에서 걸어오면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 이젠 나의 동네가 되었다. 20년 넘게 품었던 꿈을 이제야 이룬 셈이다.
광화문에서 보내는 두 번째 봄이 지나간다. 시리기만 했던 4월의 기억 위에 서서히 초록잎이 돋아나고 있다. 서른둘의 광화문의 기억. 너와 함께여서 더 자라날 수 있었다고. 그래서 따스했다고.

조금 더 날이 따뜻해지면, 따릉이를 타고 새벽의 광화문을 달려야지. 코 끝 찡한 4월의 광화문. 얼른 봄아 와라-


매거진의 이전글 내 하루가, 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