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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키티 Apr 28. 2020

번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당신을 위해


“취미가 뭐예요? 쉬는 날에는 뭐하면서 지내요?”      


20대 중반, 인턴을 떼고 처음 정직원이 됐다. 새벽 6시에 광화문에 도착해 텅 빈 도시의 빛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1층에 있던 카페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서 내 자리에 앉고 나면, 3개월 뒤에 나는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불안했다.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 사이를 축 늘어져 피해 걸었다. 3개월을 달만 보며 살았다.      


취미는 일. 잘하는 건 쉬는 날 잠만 자는 것. 친구를 만날 시간도 없었다. 밀린 업무를 집에서 해야 했고, 일요일에는 아이템 회의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또다시 일주일을 버텨낼 힘을 비축하기 바빴다.     


광화문을 떠나 강남에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꿈에 그리던 나의 책상, 나의 자리가 생겼지만 여전히 쌓여있는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쯤 나는 여유가 넘치는 커리어우먼이 되어있을까. 내가 유일하게 30대를 꿈꾸는 이유였다.     


어느 날 갑자기 번아웃이 왔다. 한 줄의 문장을 쓰는데 3시간이 걸렸다. 렉 걸린 컴퓨터처럼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컨디션 난조 혹은 내가 처한 상황들 때문일 거라 생각했는데 해도 해도 너무한 거다. 어디다 말할 수도 없었다. 핑계처럼 들릴 테고, 회사에서는 배려해줄 수 없을 테니까.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회사 근처 정신과로 달려간 첫날. 의사 선생님이 던진 첫마디.      


“저 좀 살려 주세요”


살면서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서 상태는 호전됐다. 하지만 후배 다섯을 꾸리며 나아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웠으니까.  머리와 마음이 내 몸안에서 따로노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나에게 번아웃이 찾아왔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 걸렸고, 이를 꽁꽁 숨겼지만 업무 처리 능력이 확연히 떨어지며 "안 그러던 애가 왜 이러나."라는 말을 듣게 됐다. 고민 끝에 선배에게 내 상황을 말했지만, 수년이 지나 돌아온 건 “걔는 정신도 몸도 너무 약해”라는 평가였다. 배신감에 저주를 퍼붓고 싶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 나역시 그랬다. 겪어보지 않았다면, 그냥 입다물고 있어라.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늘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다시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인정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회복이 우선이었다. 지금의 나는 볼품없었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긴 시간 애썼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덤덤하게 말할 수 있을 날을 고대했다. 아끼는 동생들이 나와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한 동생은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지내고 있다. 또 다른 동생은 갑자기 일을 그만두고는, 상담치료를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지금 잠시 멈추는 건 너의 미래에 어떤 영향도 주지않아. 쉬는 방법, 그리고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알아야해. 그건 누구도 알려주지 않아. 불안해하지 마. 너는 네게 주어진 시간과 업무에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방전된 거야. 다시 충전될거고 넌 누구보다 다시 잘 해낼 수 있어.”


동생들은 처음 겪는 감정과 자신의 변화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책했다. 번아웃이 오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오는 감정들이다.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남들은 사회생활이며 개인 여가시간까지 알차게 보내는데, 나는 고작 일로 인해 무너졌나. 작은 상자 안에 웅크린 채 갇혀버린 기분. 덩그러니 외딴섬이 된 느낌.     


나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강하다. 자칫 삐끗해서 넘어질 순 있으나,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당신은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절대 작아질 필요가 없다.      

잠시 멈춤


우리는 잠시 고개를 들고 멈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개를 들면 바뀌어 있는 계절과 호흡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시간. 무엇을 할 때 내가 회복되고 쉬고 있다고 느끼는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가는 시간.  나는 퇴사 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갔다. 무엇을 할 때 내가 제일 나다워지는지, 누굴 만나야 즐겁고 행복한지. 커리어를 쌓기 바빴을 시간이었겠지만, 잠시 멈춰있던 그 시간들은 내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시기 나와 함께 일했던 동기들은  나를 앞서 저 앞에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잠시 멈춤'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내 스스로를 좋아하는 방법을 깨우쳤을까?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어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애정 하는. 그리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들. 


스무 살 때부터 배낭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던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현지인들의 일상에 스며드는 것을 애정 한다. 현지 언어로 된 어린 왕자를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새 앨범 발매일을 기억하고 세상에 탄생하는 시간 1번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듣는 순간. 마음으로나마, 이 앨범을 탄생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애썼을 당신의 시간을 위로하며.


자주 가는 영화관의 커튼 냄새, 다리를 펴고 볼 수 있는 왼쪽 사이드 끝자리, 영화 보고 가는 국밥집. 광화문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3층 창가 자리. 미술관 뒤 벤치에서 보는 달구경. 금요일 저녁 한가한 미술관, 7월의 삼청동 어느 골목, 졸린 눈으로 기다리는 축구 경기, 아침 9시에 내려 마시는 드립 커피, 비 오는 날의 종묘, 술에 덜 깬 채 먹는 평양냉면, 혜화동 에쵸티 떡볶이, 창덕궁이 보이는 카페 창가 자리, 눈 내리는 창경궁 호수, 부암동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 늦은 밤 광화문에서 타는 따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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