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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키티 May 13. 2020

서른둘, 처음의 경계에서

미래의 나에게 건네는 용기

    

‘처음’이란 단어는 늘 나에게 설렘을 안긴다. 처음 본 영화, 처음 들어본 음악, 처음 홀로 떠난 여행. 20대 내가 한 모든 것들은 처음이었다. 늘 벅찼던 순간들.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생한 순간.


언젠가부터 ‘처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용기가 필요했고, 도전을 하고 실패를 맛보는 것에 조바심이 났다. 여러 번의 연애가 실패로 끝나고 (모든 연애는 마지막 한 번을 남겨두고 실패로 끝나는 법이지만)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드러냈을 때 상처로 돌아올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해선 안 된다는 마음으로, 사랑을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짓을 멈췄다.     


점점 성취감을 얻는 순간이 줄어들며, 일상이 반복됐고 사소한 것에 특별함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같은 영화관에 매일 앉는 내 자리를 만든다거나, 좋아하는 카페에 지정석을 둔다거나, 비가 오는 날 종묘에서 음악을 들으며 걷는다던지. 나만의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예기치 못하게 1월에 실업자가 되고, 긴 휴식을 얻었다. 실업급여를 7개월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만으로 기뻤다.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이 타의에 의해 생겼으니, 누구보다 알차게 보낼 거라 다짐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늘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다 생각했는데, 막상 적어보니 못해본 것 투성이다.      


그중 첫 계획은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타러 가는 것이었다. 러시아 북부에서 3월까지는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을 종착지로 정했다. 러시아에서 긴 시간 유학생활을 했다는 친구를 만나고 비행기와 횡단 열차 티켓팅을 막 하려던 참이었다. 코로나 19가 갑자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두 달 정도면 끝나겠지 싶어 미뤘으나, 올해 안으로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버킷리스트는 체지방률을 20% 이하로 만드는 것. 지난해 다이어트를 시작한 후 현재까지 22kg 감량에 성공했다. 퍼스널 트레이닝(PT)을 시작하고 14kg를 감량한 상태. 습관이 되기 위해선 3개월 이상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는데, 7개째 유지 중이니 운동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3분 이상 뛰지 못했던 내가 이제는 30분을 거뜬히 뛰고, 남성들만 하는 줄 알았던 벤치 프레스나 데드리프트 등 스스로 웨이트를 할 수 있게 됐다.      

운동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여실히 느끼고 있다. 여전히 게으름이 발동하면 운동을 미루곤 하지만, 땀 흘리고 나면 하루의 피곤이 가신다. 가끔은 아침마다 뒷산에 올라 명상을 했는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의 숨에 집중하는 잠깐의 순간이 하루의 기분을 결정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여름밤공기가 좋아 러닝을 시작했다. 웨이트를 하지 않는 날에는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한 바퀴 뛰곤 하는데, 약 3km의 길을 뛰고 나면 나도 모를 성취감이 솟아난다. 3분도 뛰지 못한 나는 오늘도 한 바퀴를 쉬지 않고 달렸다.


종종 함께 뛰던 옆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곤 한다. 오늘도 오르막길을 오를 때 잠깐 쉴까 싶었는데 “이제 곧 내리막길이야. 멈추면 안 돼. 조금만 참아 참아”하는 목소리가 맴돌아 피식 웃으며 끝까지 뛰고 말았다. 오기로 운동하는 습관은 고쳐야지.      

세 번째 버킷리스트는 새로운 악기 배우기였다. 매일 밤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친구를 보고는 자극이 돼 통기타를 샀는데, 하필 또 코로나 19로 인해 학원 등록을 미루게 됐다. 4월부터 본격적으로 기타 레슨을 받게 됐다. 때마침 펜더 일렉 기타가 생겨서, 통기타와 일렉을 함께 배우게 됐다. 월요일 목요일마다 기타를 어깨에 메고 학원을 가고 있다. 처음엔 코드 잡는 것도 버거웠던 나는, 이제 악보를 보고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파워 코드와 팝 뮤트, 밴딩 등 흥미로운 소리가 나는 주법도 터득했다.      

얼마 전에는 설이라는 뮤지션의 ‘눈’을 완곡하고 웃고 말았더니 선생님께서 “한 곡을 연주하고 나면 뿌듯하죠?”라고 말하셨다. 다음 주에는 영상 촬영을 하기로 했다. 펜더 들고 학원 가야지. 내 목표는 3개월 안에 캐논 변주곡을 완곡하는 것이다. 아직 기타 꼬꼬마지만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음악들을 연주하고 싶어 시작했으니, 몇 달은 지속해볼 생각이다. 한 달 만에 생긴 굳은살을 만지작거린다. 손끝을 만지는 습관이 생겼다. 꽤나 기분 좋은 촉감이다.      



네 번째 버킷리스트는 타투. 3년을 고민했던 일이다. 내 몸에 평생 새겨질 각인. 단순히 호기심으로 도전하기엔 좋았던 시간보다 오래 후회할 수 있을 테니. 시간이 훌쩍 지나도 지우기 싫은 이미지가 무엇이 있을까. 혹은 내 평생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즈음 세월호 6주기가 다가왔다. 왼쪽 손목에 노란 리본을 새겨 넣고 싶었다. 내 생애 첫 타투. 평생을 나와 함께할 상처, 아픔. 왼쪽 손목에 그린 이유는 주로 맥을 짚을 때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니까. 살아있음을,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섯 번째는 목공 배우기였다. 때때로 목공을 배우는 친구들이 서툰 솜씨로 가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볼 때마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배우고 싶다 생각만 해왔다. 코로나 19 확산이 시들해질 즈음, 우드 카빙 워크숍이 오랜만에 열렸고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실에 갔다. 첫 수업에서 나는 수저 만들기에 도전했다. 나무를 만져보고, 결을 찾는 일. 죽은 나무를 다시 어루어 살려내는 일. 혹여나 결과 반대로 칼을 쥐면 쉽게 부서지고 만다. 힘보다도 각도와 방향에 집중해야 한다. 나무를 깎다 보면 마음속 잡념들이 사라졌다. 꽤나 복잡한 마음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나무를 쥐고 있는 시간만큼은 고요했다. 언젠가 가구를 만들 수 있을까? 우선 작은 도구부터 하나씩 만들어 볼 생각이다.      

여섯 번째는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당신과 같은 방향으로 오래도록 걷는 일이었다. 늘 나의 왼쪽에 서서 분주했던 사람. 나의 다정히 너에게 닿을 때마다, 더 큰 따뜻함으로 돌려주었던 사람. 나는 가까워진 거리만큼 다시 멀어짐을 선택했다. 멀리 있어도 저 멀리서 환히 웃으며 손 흔들고 있는 너를 그렇게라도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나와 감성이 똑 닮아 있는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강요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고, 인정할 수 있었던. 서로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할 수 있었던 안락했던 사람.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는 말처럼 한동안 연애인 듯 우정 같은 감정 속에서 안도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겠지.   

   

몇 달 동안 내가 느낀 ‘첫’의 감정들은 한 문장으로 적기에 너무나 벅찼다. 사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무언가에 집중해야 했지만, 이렇게 바삐 보내지 않았다면 마음의 버거움에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3개월의 시간 동안 몇 번의 ‘처음’을 맞았는지 모르겠다. 시작이 늘 두려운 내가, 그 두려움을 깨기 위해 보낸 시간들. 훗날 시간이 지나고 서른둘의 봄을 떠올릴 때면, 또 다른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지금 도전해도 늦지 않았다고 너는 무엇이든 쉽게 해낼 수 있다고. 서른둘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용기를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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