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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을하 Dec 07. 2019

찬란 그리고 눈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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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들으면 좋을 곡 : 무릎 - 아이유




    평소보다 이른 어둑함과 더불어 어느새 쌀쌀해진 밤공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멎어질 것 같지 않던 여름의 바람들이 뜻을 이루고 조금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나 보다. 그래도 가끔은 떠나기가 아쉬운지, 여전히 낮에는 여름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곤 하는 것 같다. 온전한 여름도 가을도 아닌 그 애매함 사이에서 가만히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모호함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건 그만하고 묻어 두었던 기억들 틈으로 확 뛰어들어 보고 싶어 졌다. 잠잠한 핸드폰을 켜고, 사진을 클릭해 애써 닫아둔 기억들이 담긴 곳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자꾸만 주춤거리는 마음들은 모두 뒤로 하고, 사진 속 한 때였던 시간 혹은 장소들을 서투른 눈짓으로 조심스레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의 기억을 주워 담기로 약속했다, 일단은. 아마 마음은 지난날처럼 너무 많은 순간들을 한 번에 담았다간, 넘어지다 못해 무너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겠지. 여전히 모두가 침묵하는 고요한 밤에 이따금씩 시린 마음을 부여잡고 함께 숨죽여 울곤 하였으니. 온전치 못한 우리가 퍽 못 미더웠을 것이다.



    둘러본 지난날은 예상외로 찬란하였으며 그 앞에선 마음 또한 짐짓 평온해 보였다. 하나둘씩 찬찬히 둘러보다 문득,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억이라는 게 삶이 그렇듯 늘 나쁜 순간만 가득한 건 아닌데, 아픈 기억들만 붙들고 있다 보니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사진, 영상과 같이 기록이라는 게 참 고맙더라. 그동안 당장 눈 앞에 놓인 것들을 감당해내느라 벅차다는 이유로, 지나친 기억들을 마음속 가장 보이지 않는 한 귀퉁이에 눈길이 닿지 않게끔 내버려 두곤 하였다. 어떤 기억은 몸을 뉘일 자리도 찾지 못하고 그렇게 마음을 영영 떠났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자주 돌봐주지 못해 빛이 바래고 온통 흙먼지가 가득했을 것들이, 되짚어 본 기록 속에서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되살아 나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더듬더듬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다시는 닿지 못했을 추억들도 잘 담겨 있더라. 온갖 생각의 만물상 속에서 헤매며 살아가는 내게 기록이라는 매체는 참 고마운 이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곤 이내 감탄인지 감동인지 이게 같은 건가라는 생각의 생각을 하며, 그 순간들이 담긴 사진들을 떨리는 눈빛으로 하나하나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소중한 것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그리운 함께의 한 때


    지금의 내게는 그 순간들이 지나간 한 때라는 추억이지만, 그때의 내겐 ‘오늘’이었을 그 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한 줌도 안 되는 사진 몇 장들을 클릭해 보았으면서도, 그렇게 미리 겁먹고 또 조심했음에도, ‘지난날’이라는 되돌릴 수 없다는 그 사실 앞에 하릴없이 무너졌다. 다시 그때로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때의 나이길 바라보지만, 난 여전히 지금일 뿐이다. 나의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일까 그토록 바라던 지금이었는데, 나의 고개는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어서, 아주 잠깐 저릿한 마음으로 가슴 깊이 생각했다. 이렇게 기억으로 인해 끝없이 그리워할 것이라면,  애초에 기억을 담아내지 않는 건 어떨까 하고.


바탐 섬의 한 때(1)



    하지만 이내 이 어린 생각에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저릿한 그리움이 가시고 따스해지는 마음을 느끼며 이어온 생각들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토록 그 시간들이 짙었나 보다. 언제 이렇게 많이 담겨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 같은 그리움에 흠뻑 젖어드는 것을 보면. 그 사진 몇 장에 다시는 사뿐 거리는 발걸음으로 뛰놀 수 없을 것 같이 무거웠던 마음들이, 책상 위에 올려둔 종이가 불어 든 선풍기 바람에 휘날려 바닥으로 내려앉듯 그저 나부끼는 걸 보니. 또한 이 자그마한 걸음에도 수많은 풍경들이 불어 드는 것을 보면. 마음속 깊이 온 힘을 다해 그 시간들을 정성스레 새겼구나. 추억을 만들어 나가는 기록 앞에서 한없이 겁먹은 것처럼 행동하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아내길 멈추지 않았구나.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구나. 정말 용기 있었구나. 하고.



  그동안 어떠한 시간이든, 장소든, 사람이든 혹은 상황이든 간에 나를 둘러싼 것들을 마음에 담아내는 것을 꺼려했다. 모든 건 순간으로 이어진, 그렇게 끊임없이 지나치게 될 한 때에 불과한 것들인데, 그 찰나에 온 정을 베풀며 마음에 새기듯 담아낼 자신이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에, 영원하지 못한 한 때를 추억하며 언젠가 반드시 가슴 아파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 뻔한 이야기에 무모한 척 다시금 손을 뻗고 싶진 않았다. 걸음이 멈춰들 순간들을 다시는 만들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렸다. 숨이 벅차고 또 벅차서 마음도 가득 벅차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숨이 차다 못해, 더 이상 내쉴 힘조차 없어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가만히 숨을 고르다 깨닫게 되었다. 빈털터리였다는 것을. 마음도 몸도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의 숨을 어떻게 내쉬고 다시 들이쉴지에 대해 염려해야 할 만큼 숨 쉬는 게 어색했고 원활하지 않은 호흡 탓에 몸은 한없이 지쳐있었다. 심장이 둥둥 울리면 울릴수록 그저 같이 울어버리고 마는 텅 빈 마음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홀로 쉬지 않고 울어 왔고 여전히 울고 있는 마음과 함께 울어 주고 싶었지만, 숨 쉬는 법도 겨우 더듬어가며 해내고 있는 이가 우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만 주저앉고 일어나, 끝없는 무력감들을 치워버리고 싶었다. 이 모든 좌절이 이전의 방법으로 인해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 이르게 된 것이라면, 그 잘못된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여 다시 시도해 나가면 되지 않은가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깊은 돌아봄 없이 마음을 열심히 채워내면 다 해결이 될 거라 간단히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걸음의 앞에는 두려움만이 가득해서, 그 어떠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또 무너지면 어쩌지, 그렇게 영영 무너져버리면 어떡하지, 그렇게 눈만 뜬 채로  덧없이 살아가게 되면 어떡하지 와 같은 생각들이 가득했었다. 그렇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끌어온 허상의 미래에 살며 앞서서 나아가지 못하고, 미리 걱정했다. 과거의 아픔이 재현될 까 두려웠고, 미래에 그 아픔만이 가득할까 두려웠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인가 오늘에 있지 못했다. 온전히 있지 못했다. 그 불안정함 속에서 발버둥 치다 지쳐, 이게 나의 영원인가 싶었다. 영영 텅 빈 마음으로 오늘이 아닌 오늘을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좌절했었다.


바탐섬의 한 때(2)



    그 시간들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발버둥 치는 것조차 잊었던 나날이었다. 나의 오늘이었지만 나만 없는 그런 오늘들이었다. 어느새 텅 빈 마음은 익숙함으로 자리했고, 때론 마음을 채우는 건 그렇게 마음을 다 해 사랑하는 건 아주 머나먼 언젠가의 일이겠구나 하며 살았다. 그렇게 여전히 숨을 쉬기에, 살았다. 영영 그런 사람일 줄 았았다.


    그러나 나도 모른 사이에 나는 부단히 오늘에 속도를 맞춰 걷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또한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색하지만 아주 조금은 오늘과 걸음을 맞출 수 있게 되었었다. 매번 버겁다 생각했던 오늘들에 대한 나의 여러 생각들은 오늘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결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사무치다 못해 괴롭다 여겼던 지난날의 한 때는 내가 불가능이라 단정 지었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심으로 사랑해냈던 멋진 순간들이었다.



    치열하고 숨 막힌다 생각하며 버거워했던 오늘들은 훗날 기억도 안 날 만큼 스쳐 지나가는 한 때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 한 때라, 되돌릴 수 없는 때라 너무도 그립다며 추억은 아픈 것이라며 탓하곤 했지만 결국 한 때라 그토록 뜨겁고 찬란한 것이겠지. 그 아름다움이 모여 오늘의 나를 뜨겁게 하기에, 그렇게 빛낼 수 있도록 하기에. 설령 모든 것이 꺼져버린 듯한 캄캄한 순간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이러한 순간들조차 한 때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 나아갈 수 있는 것이겠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란 말이 참 위로가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려나. 또 다가올 눈부심을 찬란으로 기억하기 위해,  어제를 정리하고 오늘을 담으며 내일을 기대해야겠다.



지난 찬란에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눈부심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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