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의정부시 아이사랑 수필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아이고 아가 아를 낳았노.
야가 딸이가 아들이가 내때는 먹고 살기 바빠가 아 이쁜 줄도 모르고 키웠다”
나는 의정부의 오래된 주택가 사이 빌라에 산다. 그리고 우리 빌라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커다란 평상, 오른쪽에는 의자 대여섯 개가 손바닥만 한 빌라 처마 아래 줄을 지어 있다. 그리고 건너편에는 고물상과 30미터 지점 편의점 데크엔 손님을 위한 테이블 세 개가 있다. 그리고 바로 뒷골목엔 놀이터가 있는데, 그곳엔 우거진 나무 아래 정자가 있고, 운동기구 몇 가지가 있다.
내가 3주된 갓난아이를 안고 택시에서 내렸던 날, 옆 동에 사시는 경상도 할머니를 마주쳤고, 이후에는 양 옆 동 할머니들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났는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아이를 보여주고 인사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할머니들은“낳아놓으니 금방이제”라며 깔깔 웃었다.
한여름의 장마철, 몹시 추운 기온의 겨울밤이 아니라면, 고물상에 폐지를 팔고 편의점 앞에서 막걸리를 마시거나, 평상에서 수박을 나누어 먹거나, 그늘 아래 폐지와 병을 정리하거나,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거나, 놀이터에는 공공근로 하는 노인분들로 동네 곳곳이 만석이었다.
나는 스물 여덟 살의 제법 어린 엄마다. 임신했을 땐, 스물 여섯이었으니 배가 불러 뒤뚱뒤뚱 걸어 다니면, 내가 넘어질까봐 동네 사람들이 오히려 마음을 졸였다. 그런 내게 이웃 할머니들은 좋게 말해 친정엄마 나쁘게 말해 잔소리 꾼이다.
어느 날 아침 남편 출근길에 나와 혼자 아이를 안고 동네 산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할머니가 담벼락 아래 리어카를 세우더니 허리를 폈다.
“아가 보기 힘든 세상인데 여긴 어쩐 일이고. 몇 개월 됐나”
“곧 돌이에요~ 여름아 할머니 안녕하세요 해야지”
“내가 애 키울 때, 소 뼈를 푹~ 고아서 밥 말아 맥였는데 으~찌나 잘 먹던지 그거 먹고 우리 아들 천장에 머리 닿도록 컸어. 집에 곰국 끓이는 냄비 있지”
나는 이후에도 십분 남짓 붙잡혀 할머니의 레시피를 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내가 지나가면 먹고 사느냐 애 예쁜 줄 모르고 키웠다는 할머니들의 아쉬움은 묵을 때로 묵은 잔소리로 내뱉어졌다.
할머니들은 내 아기를 자신들의 손주처럼 보고 싶어 했다. 혼자 지나가는 날엔 아는 우짜고 혼자 나왔냐며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가 9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을 보냈다. 육아휴직 중이라 곧 회사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을 피해 뒷골목으로 돌아갔다. 쪼매한 녀석 엄마 없이 어쩌냐는 잔소리가 삐져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원 후에도 후다닥, 등원할 때도 호다닥 나와 유모차를 뛰면서 밀었다.
나는 강원도 작은 바다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동네 누구 집에 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나뿐만이 아닌 모두가 알았다.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때로는 야단을 맞을 때도 있었고, 문방구 아주머니는“할매는 잘 계시나”라며 할머니 안부를 묻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혼이 나도’앞으로 그러지 말자’라며 나를 다독였고, 문방구 아주머니는 도화지 한 장, 서예 도구 세트를 돈을 받지 않고 줘도 아까운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우리를 키웠다. 그런 부모 같은 내 이웃들이 멀어진 건, 내가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가고, 그들의 삶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때였다. 때로 이웃이었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릴 때, 혹은 많이 아파 병원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오래전 기억에 구슬프긴 했지만, 그저 안타깝다는 매정한 말로 내 마음을 털어냈다.
이후에도 어디에 살든 근처에 사람은 살았다. 나는 단독주택에 산 것이 아니니 옆집에도 앞집에도 아랫집에도 누군가 살았겠지. 하지만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나는 궁금하지 않았고 피곤했고 바빴다. 이웃이 없이 산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를 낳고 나서 이웃이 내게 온다. 궁금하지 않던 이웃이 궁금해진다.
마지못해 인사를 하기 시작했던 동네 이웃들에게 아이의 백일 날 손바닥만 한 백설기를 건넸다.
“할머니 별거는 아니고, 떡 좀 드셔요. 애가 있으니 동네가 시끄럽죠 밤마다 너무 울어서.. 죄송해요”
할머니는 플라스틱병을 옆쪽 박스로 던지며 말했다.
”아 우는 게 아 일인데 괘안타 가마이이쓰바~ 백일 떡은 그냥 받는 게 아인데”
할머니가 주머니를 뒤적이자 괜히 민망함이 머리끝까지 차다 못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지폐 몇 장이 나왔다. 나는 아이 핑계를 대며 얼른 올라가 봐야 한다며 나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라갔다.
다음 날이었다. 집 문 앞에는 누가 뒀는지 모를 가지 서너 개가 치킨집 봉다리에 넣어져 문고리에 걸려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아기 내복, 그리고 다음 날은 계단을 올라가는데 아랫집 아주머니가 맨발로 뛰어나와 기다렸다며 하얀 봉투를 줬다. 봉투에는 빳빳한 3만 원과 함께 작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안녕하세요 202호입니다. 늦었지만 여름이의 출생을 축하해요. 우리 딸도 5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나 왠지 모를 친근함이 훅 다가오네요. 따뜻한 부모님의 보살핌으로 태어난 사랑스러운 여름이의 앞날이 세상의 기쁨이고 이 땅의 빛이길,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길 위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날 저녁에는 문고리에 종이백이 걸려있었다. 그 속에는 컵라면 네 개와 과자 두 봉지가 들어있었는데, 직접 준 202호 아주머니 말고는, 이 선물들이 어디에서부터 왔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그들은 문 앞의 <노크, 초인종 누르지 마세요. 아기가 깹니다. 문 앞에 두고 문자 바랍니다> 라는 문구를 보고 문고리에 살짝 걸고 뒤돌아서지 않았나 싶다.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누가 가지를 줬는지, 누가 내복을 줬는지, 또 누가 컵라면과 요깃거리들을 줬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질까 싶어 묻지 않았다. 할머니들은 이후에도 나만 보면 미지근한 박카스나 요구르트를 건넸다. 그리고는 꼭 한마디씩 덧붙였다. "내 손주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아직 애 같아! 네가 어른이다!”
할머니들은 내가 민들레 홀씨와 같았던 자신의 손주 같고, 어린 날 외지에 시집온 본인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한 할머니는 내가 강원도에서 시집왔다고 하자 “내가 시집와 집 옥상에 장을 담궈 장독을 보는데, 그 모양새가 참 어색한게 꼭 나같더라고” 라며 내 마음을 후벼팠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 같은, 아직은 내 집이 아닌 것과 같은 낯선 느낌. 그래서 그런지 유독 아랫집 할머니는 내가 손목 보호대라도 차는 날엔 애를 봐줄 테니 한의원에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아이라는 존재는 과거의 힘들었던 어린 나를 연상시키고, 때로는 그리운 친정엄마, 목숨보다 소중했던 나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를 낳고 난 이후로 나는 사람이 좋다. 한때 삶에 지쳐 우울증을 겪고 인간이라면 치를 떨었고 사람의 온기가 마냥 귀찮고 현관 노크 소리만 들어도 짜증이 솟구쳐오르던 내가, '노크하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지우고, '종종 노크해주세요'라고 고쳐 쓰고 싶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 물론 자체만으로도 불구덩이에 뛰어들 만큼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내일이 그저 지치던 나를 순간이 기다려지게 하고, 이웃이 궁금해 지게하고, 모든 세상 빛이 되어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한다. 너무 사랑한다. 어떠한 것도 낄 틈 없게 사랑이 촘촘하게 세상을 메운다. 이 아이를 낳고 나서 그렇게 내 세상은 제 색깔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