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온 곳이 목욕탕이었던 것에 관하여

by huistory

한참 인테리어 실장으로 있을 때, 업무로 인한 전화가 하루에 수백 통씩 오던 날이 있었다. 그런 날엔 머리를 감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수시로 폰을 쳐다봤다. 온 세상의 진동이 다 내 폰에서 울리지만, 쳐다보는 순간 멈추는 것 같은 착각이 수시로 들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별게 아니었다. 휴대폰~ 진동이~ 울립니다-.


그날 나를 깨운 것도 알람 소리 대신 전화 진동소리였다. 발주한 제품이 현장에 도착했으니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는 전화였다. 문자로 드릴게요~ 하고 끊었지만, 이미 상대의 문자엔 어제저녁 친히 보낸 비밀번호가 찍혀 있었다. 짜증이 가득한 손가락은 똑같은 문자를 그대로 복사하여 보내기를 누른다.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첫 현장으로 목적지를 설정하고 1시간 거리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라, 차가 나를 운전하는 것 같았다. ​




오전 7시 55분. 현장에서 전화가 온다. 목공 팀이 진입했다는 전화다. ​


네 거의 다 왔습니다. 나머진 만나서 얘기하시죠. ​


그 짧은 말을 하는 동안 폰에선 해피콜 문자가 울린다. 다른 현장의 에어컨 팀이었다.

천장에 설치되는 시스템 에어컨은 체크 할 게 많아, 할 말이 많은 통화였다. 에어컨 팀에 작업해 둔 도면을 보내주고, 그것을 설명하려 한참 애썼다. 그 시간이 무려 10분이나 걸렸을 줄은 몰랐다. 그새 해피콜이 6개가 와있었다.​



점심시간쯤 되니 다행히 여유가 좀 생겼다. 그날 오전에 온 전화만, 대강 봐도 200통은 넘어 보였다. 메시지 함은 해피콜 문자만 가득했다. ​


서둘러 카페에 들어가 내일 있을 지시 내용들을 도면화 시켜놓고, 다음 주에 들어올 싱크대 발주를 넣는다. 아. 실측지를 두고 왔다. 실측지가 없으면 발주를 넣을 수가 없었다. 망할 실측지가 있는 현장은 차로 1시간 거리였다.

이동하는 동안 전화가 또 끊이지 않고 울렸다.


​ 네, 그건 내일 옵니다. 네, 거기에 전기 뽑아놓으셨죠? 네 현장 정리 잘해놓으셔야 해요. 오늘 소비자 들린대요. 그러니까요. 네 고생하세요.​


혼자 가는 차 안이 외롭진 않네~라며 썩은 위로를 해본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 그날 있을 전화는 웬만큼 다 온 것이다. 현장도 슬슬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나는 그제야 점심도 먹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 밥을 먹으러 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저녁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장이나 사무실을 가자니 턱 끝까지 찬 피곤에 차마 일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렇다고 편도로 1시간 이상 걸리는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고르고 골라 선택한 목적지는 목욕탕이었다.


​ 씻기 위해서 간다고 입술을 질근,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상의 이유는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곳이란 결론이 나서였다.



목욕탕 입구엔 성인 세 명이 거뜬히 비칠만한 대형 거울이 있었는데, 웬 남자가 머리털도 하얘질 만큼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있었다. 어깨 위에 소복이 앉은 먼지를 툭툭 털며, 몸 구석구석, 폐와 심장 어딘가에도 먼지가 잔뜩 들어앉은 것 같다고 느꼈다.


​ 샴푸랑, 바디워시, 세안제도 주세요. ​


훔치듯 그것들을 받아 들고, 남탕으로 향했다. 얼른 옷을 벗어던졌다. 옷에 불이라도 붙은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휴대폰을 옷 옆으로 슬쩍 밀어 두고 라커를 닫았다.



흐르는 물줄기를 맞으며 간단히 비누 샤워를 하고,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탕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무릎까지. 다음엔 허리까지. 다음엔 목이 잠기는 깊이까지. 어쩌면 뼛속까지 잠기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


벌거벗은 사람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돌아다닌다. 지위도 직급도 갑을 관계도 없는 채였다. 부끄러움도 어색함도 열심도 부지럼도 없는 채였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졸려서는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고 덮이는 눈두덩이었다. 감기는 눈이 너무 무거워 현실까지 덮었다.

몇 차례 덮고 뜨길 반복하다 결국은 또렷이 앞을 다시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