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록 Dec 29. 2019

감사로 엮인 책

19.08.01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날짜는 5월 8일, 여행지에서 쓴 글을 최종적으로 모조리 읽어보고 나름의 1차 검수를 마친 시간은 7월 말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무려 3달 만에 미뤄둔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과정은 나의 글을 먼저 읽어보고 자신들의 개성을 가득 담은 일러스트와 그림을 부탁하는 것, 나보다 조금 더 글에 예민하고, 문장에 예민한 친구에게 글의 1차 검토를 부탁하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마치 내가 글을 어디 인터넷 구석 어딘가에 올리기만 해도 당장 출판사 또는 사람들이 알아보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 착각했다. 처음 글을 올리기 시작한 네이버 블로그뿐 아니라 여행 뒤에 한국에서 다시 수정하면서 올리기 시작한 브런치까지, 언제쯤 내 글을 보고 나에게 연락을 해오나 내심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의 글은 수없이 많은 정보 속에 파묻혔고 수정 작업을 모조리 마친 지금까지도 그 어떤 출판사에서도 나의 글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사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꽤 서운한 마음이 들긴 했다. 나는 항상 자신을 과하게 착취하는 만큼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과신하기에 나의 글이 생각보다 별로구나 싶은 마음에 괜히 속상해졌다. 어쨌든 여행을 출발하기 전부터 꿈꿨던 것은 '여행 기간에 글을 써서 책으로 만든다'였기 때문에 최대한 끝까지 완성해보고 싶었다. 내 글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보단 누군가가 내 글을 읽으면서 나와 같은 위치에 잠시나마 함께했으면 좋겠고, 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면 좋겠는 마음에 주변 이들에게 그림과 일러스트, 검토를 부탁했다. 사실 나는 그들을 무척이나 신뢰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더라도, 내 글을 완전히 혹평하더라도 괜찮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들의 도움에 감사할 도리밖에 없다.


지금껏 내가 읽어온 많은 책 중에는 독립출판 서적 역시 꽤 많았다. 독립출판 서적을 읽을 때면 괜스레 나 역시 이렇게 출판을 할 수 있겠다 싶은 마음에 가뜩이나 부푼 마음이 터질 듯 더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글과 관련된 일을 마무리한 지금 무척 뿌듯하다. 나에게 맡겨진 몫을 최선을 다했고, 이제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책을 완성하는 과정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사실 귀국 직후에는 무척이나 심란했다. 내가 자주 만나는 네트워크에는 일러스트나 그림을 담당할 만한 친구가 없었고, 그 때문에 내가 직접 그림을 배워서 그려야 하나 걱정도 많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서 나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가 쓴 글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어떤 친구들은 큰 자신감은 아니었지만 흔쾌히 도와주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그들 역시 어떤 작업도 진행해본 경험이 없는 초보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울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감사하게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속한 꽤 많은 공동체에서 리더의 자리에 서 본 경험이 있다. 나는 리더의 자리를 여러 번 겪으면서 내 한계를 명확하게 발견했다.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1년가량 리더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음을 알았다. 처음 리더에 자리에 올랐을 때는 기쁜 마음에,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모든 것을 나 혼자 다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나의 시간이 부족하고, 나의 능력이 부족하고, 나의 기술이 부족해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절대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구나."

그때부터 나는 아웃소싱을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서서히 다른 이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 걱정되었다. 나 자신도 완벽하지 않지만 나는 적어도 내가 일을 책임져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고, 다른 이들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하더라도 책임은 결국 일을 맡긴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문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고, 때로 누군가를 과감하게 믿고 맡겼을 때 그들이 내놓은 결과는 내 기대치를 훨씬 웃돌았다. 이런 경험이 한 번, 두 번 쌓이기 시작하자 조금은 이 과정이 자연스러워졌다. 내가 팀을 구성할 수 있다면, 내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고, 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이런 경험들 때문에 나는 어떤 결과물이 나오던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마음껏 해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내 부족함을 채워주면서도,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은 임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완벽한 팀워크를 보여줬다. 그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사실과 무관하게 주변으로부터 일 잘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들 덕분에 나도 덩달아 신뢰받을 수 있었다. 효율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효율은 함께 공동체를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었고, 그들에게 끝없는 감사를 전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줬다. 


지금 역시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면서 내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작은 팀을 만들었다. 그들과 함께 책을 만들어가는 일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을 나는 여러 경험을 통해 배웠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애쓰다 보면 결국 끝없는 비교와 좌절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내가 못하는 것이기에 애써 해 나가면서도 좌절하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과 끝없이 비교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협업하면서 다른 이에게 나의 부족함을 알리고, 다른 이가 나의 부족함을 채우는 과정은 그 자체로 효율적이면서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서로에 대한 감사를 배우는 과정이 된다. 

책을 준비했던 것은 나지만, 책을 만든 사람은 내가 아니다. 글을 쓴 사람은 나지만, 책을 완성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지금의 자리에 없을 것이며,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의 책은 감사로 엮였다.

작가의 이전글 안식년의 화려한 마지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