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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록 Jan 02. 2020

나는 지금 인생 최고의 때를 지나고 있다

19.08.07


문득 밤늦게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인생 최고의 때를 지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조금 뒤면 내리막길을 걸을 것이고 다시는 지금과 같은 행복한 순간을 다시는 누리지 못할 것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즐거운 경험을 했다. 기억이 선명하지 않았던 고등학교까지의 학창 시절이 지난 뒤에 내가 맞이한 것은 더없이 찬란한 대학 생활이었다. 비록 수능 실패로 원하던 성적을 얻지 못했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누렸던 대학 생활은 더없이 찬란했다.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아르바이트하며 벌게 된 돈은 나를 위해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고, 몇 번의 여행은 내가 자유로운 신분임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2012년 대학에 입학한 이후 2년 남짓한 군 시절을 제외하고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나에게 수없이 많은 면죄부를 제공해주었다. '대학생은 그럴 수 있지'처럼 나중엔 누릴 수 없는 것을 누리고 있으니 지금 열심히 즐기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함께 학교에 다녔던 선배들 역시 대학생이 가장 좋을 때라며 나를 격려했고, 나는 그들의 격려에 걸맞게 마음껏 대학생 신분을 즐겼다.

7년 동안 누렸던 대학생 신분은 2019년 3월 대학 졸업장을 받으며 끝났고, 나의 신분은 대학생에서 백수 또는 취업준비생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나의 신분이 바뀌었지만, 나를 둘러싼 세계는 더없이 크게 요동쳤다. 하루, 한 시간, 1분, 1초를 무언가 가치 있는 행위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의 말이 괜히 괘씸했다.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 만이 정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올해 나는 안식년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2019년까지 내가 얻은 것이라곤 겨우 대학 졸업장 하나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기업 사원이 되지도, 번듯한 직장인이 되지도 못했지만 나는 나를 위해 시간을 온전히 쓰고 싶었다. 


2년간 나를 열심히 착취함으로써 얻어낸 어머니와 여행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더없이 행복했던 것은 그곳에서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 써낸 38개의 글과 그것이 모여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묶일 한 권의 책을 얻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돌아온 5월부터 아르바이트 자리를 다시 물색했고, 다시 나를 먹이고 살릴 2개의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나의 하루하루는 책과 함께 살고, 책과 함께 잠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는다. 신간이 나오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마음껏 읽고,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 개봉 당일에 보는 호사를 누린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해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어머니와 여행을 다녀오고 더없이 만족스러워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 중이다. 어느덧 부모님은 결혼 30주년을 지나고 계시고, 전부터 꿈꾸던 하와이 여행을 12월 다녀올 것이다. 물론 나도 함께. 다행스럽게도 지난 여행에서 남은 돈으로 하와이 왕복 항공권을 끊었다. 항공권에 모든 돈을 쏟아부어, 아직 숙소 예약도 하와이에서 즐길 액티비티도 예약하지 못했지만, 하와이에서 행복할 부모님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두근두근 뛴다.


이렇게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음에도 끝없이 두려움은 엄습해온다. 지금 만족한다고 평생 만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를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중에 뭐 먹고살려고? 그렇게 해서 결혼은 하겠어? 돈을 모으기는커녕 모으는 족족 써버려서 나중에는 어떡하려고? 

수없이 많은 불안이 나를 뒤덮는다. 이런 불안이 나를 잠식할 때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서 무력감이 든다. 그 어떤 질문에도 쉽사리 답할 수 없어서 슬프고, 과연 나 역시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상상하는 그런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싶어서 답답하다. 사실 내가 직업을 가진다고 한들 쉽사리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하겠지만, 적어도 나의 직장이, 나의 지위가 나를 보다 큰 신용을 가진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기에 지금 내가 잘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끝없는 불안이 나를 잠식할 때면, 처음 내가 생각하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는 지금 인생 최고의 때를 지내고 있는 거구나, 앞으로 나에게 내리막길만 가득한 것이구나 싶다.  


그러다 문득 읽은 소설의 한 글귀가 나를 위로한다.

“나는 살아남을 것이고 누구보다 행복할 거예요.”

나는 가능성의 문을 계속 열어두고 싶어 졌다. 5년 전 유럽을 다녀올 때만 해도 다시 유럽을 못 올 줄 알았고, 어머니와 여행을 마칠 때는 더 이상 어머니와 여행을 다닐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아르바이트 자리를 그만둘 때, 다시 이처럼 좋은 아르바이트를 찾을 수 있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나는 몇 달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하와이 여행을 떠날 것이며, 내가 쓴 글은 책으로 엮여 누군가에게 선보일 것이다. 나는 더없이 완벽한 아르바이트를 다시 구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하루하루 행복을 누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은 사실,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였고 나는 더없이 행복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1년의 안식년은 어쩌면 안식보다는 다시 나를 착취하는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것을 착취로 느끼지 않는 까닭은 내가 하고 싶어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서 글을 쓰고, 내가 좋아서 책을 읽으며, 내가 좋아서 여행을 떠나고, 내가 좋아서 일하는 것. 더없이 큰 호사를 나는 누리고 있다. 행복하다. 지금 내 삶이 만족스럽다. 외부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행복의 분수가 계속 분출하고 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남고 있고,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것으로 됐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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