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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Apr 14. 2020

백수는 투표가 하기 싫었...

유치한 거 아는데, 이쪽도 저쪽도 다 짜증 나는 마음

"투표했어?" 사전투표일 오후에 만난 친구가 물었다. 모임 직전 주민센터에 들러 투표를 마쳤다는 그는 사상 최고라는 사전투표율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우세를 말해주는 지표라 판단한 듯 묻는 중에도 휴대폰으로 실시간 경신되는 투표율을 확인하며 들뜬 모습이었다. "당일날 해야지." 한 친구가 화답하는 가운데 난 갑자기 울컥 심사가 뒤틀려서 "난 안 할 거야. 찍고 싶은 후보가 없어."라고 삐딱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또 한 마디 덧붙였다. "이쪽도, 저쪽도 다 싫어."


나도 내가 유치한 거 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투표를 거른 일은 거의 없었다. 나 하나쯤.. 하는 마음이 정치 무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부동층의 이탈을 초래하고, 나아가 누구도 원치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냥 순간적으로 미운 말이 나왔다. 한동안 나 한 몸 어떻게 살 지 애태우며 동동거리다 보니 이웃, 지역, 사회, 나라를 생각하는 유권자로서의 마인드가 실종되어 버렸나. 내가 행사하는 소중한 한 표의 의미 따위 살 만하고 속 편한 사람들이나 찾으라며 비뚤어져 버렸나.


조금은 그런 것 같다. 솔직히 이번 총선, 지역구 국회의원이 하이라이트인데 뽑고 싶은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다. 보수의 품격 어쩌고 하면서 탈당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기어들어가 거대 통합을 이룬 현직 야당 국회의원 후보부터 일단 패스. 그렇다고 영입 직전까지 유명세 있는 직장에 출근하다가 파격적으로 전략 공천되어 과연 지역구에 전셋집이나 얻었나 의심스러운 여당 후보도 그냥 그렇다. 차라리 평생 전 국민에게 월 150만 원을 준다는 듣보잡 황당무계 정당의 공약이 오히려 흥미로운 수준이다.


한번 삐딱선을 타니 끝이 없다. 하도 취직이 안 돼서 이래저래 생각해본 알량한 출구 전략들도 코로나 19 & 사회적 거리두기로 좌절된 이 마당에 총선만은 63빌딩 7개 높이만큼 일회용 비닐장갑을 써대며 예정대로 열려야 하는지부터 의문이다.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계 진출의 길을 열어준다며 난투극을 불사하면서 선거법 개정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온갖 비례정당 이름 넣느라고 투표지가 고대 파피루스 두루마리만큼 길어진 것도 무슨 조홧속인가 싶다. 무엇보다 잘나고 똑똑하신 코어 그룹들이 그린 '큰 그림'의 결과 이런 난리판이 짜였는데 굳이 해결을 위해 보잘것없는 백수, 바로 너의 한 표가 꼭 필요하다고 4년 만에 친한 척하는 것도 별로다.


투표지가 길어진 만큼 선택의 폭도 넓어진 것 같지만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목소리를 쫓아가면 결국 양대 진영으로 나뉘는 것도 지겹다. 한쪽에서는 경제가 망할 거라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개혁이 물 건너갈 거라고 한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이겨야 최악의 시나리오를 면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런 경고를 들으면서 둘 중 하나에 투표한 지도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 다들 자기네가 이기면 희망이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지금의 난국은 누구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기세를 보면 다들 전 세계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렇게 복잡한 심사를 친구들과 나눌 수는 없었다. 이미 투표를 하지 않겠다, 뽑고 싶은 사람이 없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오십 보 백보라는 말을 날려 갑분싸가 되어버린 후였기 때문에. 그 분위기는 이런저런 다른 화제들이 어색함을 덮어버린 후에도 조금은 남아 입맛을 쓰게 했다. 결국 난 헤어져 돌아온 날 밤, 다들 이런저런 일로 속 시끄러울 텐데 내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일이 안 풀려서 멘탈이 좀 그러니 이해해달라는 사과 톡을 날려야 했다. 물론 착한 친구들은 수십 년 간 이어온 우정의 힘으로 즉시, 괜찮다고 화답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애가 상태가 안 좋다고 판단했는지 한 친구가 주말이 지난 뒤 다시 커피 한 잔 하자며 자기 동네로 호출했다. 버스에서 내려 보니 군소 정당의 한 후보가 트럭에 올라 유세를 하고 있었다. 수행하는 선거 운동원도 없고, 듣는 사람도 없이 홀로. 나중에서야 외로워 보이게 하는 의도적인 세팅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순간 정면을 바라보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진지해 보였다. 친구에게서 이미 그가 낙선을 해도 별 걱정 없는 번듯한 전문직업인이란 말은 들었지만 어쨌거나 정계에 투신해 구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이 다 겉치레만은 아닐 것이다. 내 지역구는 아니지만 조금은 응원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이렇게, 4년마다 한 번씩 속으면서 세월이 가는 건가. 하긴 선거공보도 이미 받아봤고, 백수지만 투표권은 있으니까. 난 아직 일회용이 되기에는 조금 남았으니 한번 더 투표한다 해도 나쁘진 않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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