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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즈 uze May 16. 2020

혼자 민망한 면접

정부서울청사는 뒷문으로 들어간다 


코로나-19로 바짝 얼어붙은 고용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가 약 155만 개의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은 물론 공무원·공공기관 채용도 이달부터 시작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갑자기 생각난 추억 하나. 이번 공무원·공공기관 채용도 4만 8천 명에 달한다지만 머릿속으로는 '내 해당사항은 아니야, 쉽지 않아' 하는 생각만 든다. 2년 전 스쳐갔던 정부서울청사와의 진한(내 입장에서는) 추억 때문이다. 


힘들게 영업해 돈 벌 필요 없이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공사'가 든든하다는 건 이미 정설. 정부, 지자체가 돈을 대는 '재단', 운영비, 사업비를 지원받는 각종 '공공기관'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진 지 오래다. 물론! 정부 및 각 지자체 정식 직원인 '공무원'으로 입성하는 것이 그중 최고겠지. 아는 사람은 이미 알겠지만 이 어마무시한 공무원을 한시적으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나라일터'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자매품 '나라장터') 정부 각 부처 및 전국 시, 군, 구 지자체에서 '시간선택제임기제' '일반임기제' '경력경쟁채용' '기간제' '민간경력채용' '별정직' 등 다양한 이름을 붙여 게시한 채용공고들을 볼 수 있다. 이름마다 조금 뉘앙스가 다르긴 한데(예를 들어 기간제는 미화, 시설관리 등 직종에 자주 쓰이고 별정직은 직급이 높을 때 흔히 사용함) 결론은 민간 경력자를 정해진 기간 고용할 것이며 그 기간만은 공무원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      

     

기간은 1년 미만부터 3년 정도까지 다양. 채용공고에 "근무 실적에 따라 근무기간 연장이 가능하다"는 문구가 꼭 따라다니지만 보통 최장 5년 범위 내(공무원 노조가 눈을 시퍼렇게..ㅠㅠ)라서 그야말로 고용연장은 케바케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어차피 민간기업도 당장 내일 앞일을 모르는 데다 날이 갈수록 조직 내 입지가 좁아지는 과장, 차장, 부장님들을 널리 불러 모으는 은혜로운 경력직 채용이라는 점에서 어떤 공고든 나왔다 하면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며 이 시대 청년 & 중장년 취업의 어려움을 대변하는 산 증거가 된다.     

     

나 역시 이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얼쩡거리며 눈팅을 하다가 원서를 냈는데 결국 기록적인 폭염 & 열대야를 기록했던 2년 전 여름, 거의 한 달 가까이 땀 흘리며 에너지만 낭비했던 기억이 있다.(아, 생각하니, 다시 더워,,ㅠㅠ)      

내가 지원했던 곳은 무려 대통령 직속으로 생겨난(위원장이 총리임. ㅎ) 어떤 위원회. 이런저런 사업들을 벌인 뒤 해체되는 한시적 위원회라서 여러 분야에 걸쳐 '어공'('어쩌다 공무원'의 줄임말. 반대말로는 '늘공'이 있음)을 뽑고 있었다. 심지어 근무기간은 꼴랑 9개월. 왠지 급조한(각 부처에서 차출 나온 공무원들이 휴게실에 모여 빨리 '실무자'를 뽑자며 볼멘소리를 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음) 느낌이었는데 난 이런 알바 아닌 알바를 선호하는 이상 성격이라 짧은 기간에 오히려 혹해 원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이 '나라 일자리' 지원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경력 증명은 모두 이전 직장에서 직접 받아야 하고, 6개월 이내 발행한 것만 유효하며, 심지어 당시 맡았던 업무, 증명 발행한 담당 직원의 연락처 및 서명까지 명기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기도 한다. 자기소개서, 이력서는 물론 최소한 A4 5장 이상의 업무수행계획서를 써내야 한다.(크몽 같은 사이트에서도 직무수행계획서 대행 및 감수는 단가가 세다). 2만 원 가까이하는 정부수입인지를 사서 붙이라는 데도 있고, 심지어 방문 접수(평일 근무시간만 가능)만 받는 곳들도 있다.

     

이 9개월짜리 '어공' 일자리는 앞에 적었던 요구조건을 대부분 포함하는 곳이어서 이래저래 준비하다 보니 접수 마지막 날이 되어버렸다. 접수처는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지나다니면서 쳐다만 봤지 들어갈 일은 없었는데 이번에 한번 가보겠네. 왠지 떨리는 기분. 그런데...  시기는 그야말로 쩔쩔 끓는 한 여름. 잠깐이라도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할라치면 금세 땀이 흥건해지는 그 더위를 뚫고 소중한 서류봉투를 쇼핑백에 넣고 기운차게 출발했다. 그냥 서류를 내러 왔지만 혹시 관계자를 만날지도 모르니 차림새도 좀 예를 갖췄다. 그러니까 무지 덥게 입었다는 이야기.       

     

경복궁 역에서 내려 정문 쪽으로 휘적휘적 가다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없고 경찰들만 잔뜩 있었다. 땀을 훔치며 물어보니 방문하려면 뒤쪽 안내실로 가야 한단다. 그렇구나. 그때서야 왜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웃겼다. 여하튼 다시 후문으로 고고. 결국 난 그 거대한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돈 거다. 입사 기원을 위한 탑돌이?     

     

청사 후문에 위치한 안내실 문을 여는 순간 난 정부서울청사의 위상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회의, 견학, 입사지원, 진정 등 각종 업무로 찾아온 방문객들, 그들을 찾아 내려온 공무원들, 더위를 피해 그냥 들어온 시민들이 엉켜 복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내실 바깥에는 각종 택배차량들이 주차한 뒤 박스들을 내리고, 또 이걸 출입증을 패용한 공무원들이 나와서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 어쩌지. 고민하다가 담당 공무원 내선번호로 전화하니 누가 내려갈 거라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난리를 조금 더 구경해보니 리셉션 데스크에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이 되면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발급해주는 서울시와는 달리(가본 적 있음) 여기서는 누구든 나와서 데려가야 하는 시스템인 듯했다. 그러니 안내실이 이렇게 난리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10분쯤 기다렸나. 내 앞에 피곤한 표정의 누군가가 나타나 그 위원회의 앞 글자만 이야기했다. "네"라고 대답하고 봉투를 내미니 말도 없이 그걸 채가지고 가버렸다. 접수증이라도 써줄 거라고 생각한 건 오버였나. 그렇게 정부 '어공' 지원은 더위 속에 일차 마무리되었다. 

 

과연 접수나 됐을까 싶었지만 며칠 뒤 나라일터에 다시 서류합격자 공지가 났고 심지어 내가 포함되어 있어서 의심은 가셨다.(왜 됐는지는 미스터리) 내 지원분야 면접 대상자는 나 포함 총 3명인데 보아하니 세대별로 안배한 듯싶었다. 어떻게 아냐면.. 가운데를 모자이크 처리한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무려 생년을 표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태(80****). 오 마이 갓! 블라인드 전형이나 별도 부과한 접수번호 같은 건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휴대번호 뒷자리 정도로만 해줄 수는 없었을까. 어쨌거나 가장 빠르고 충격적으로 본인임을 인지하기는 했다. 

     

면접 시간이 대낮이라 별 수 없이 연차를 내고 면접을 갔다. 담당자가 나오고, 리셉션 데스크에 신분증을 내고, 비표를 받고서야, 면회실을 나서서 정부서울청사 본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항에서 볼 수 있는 엑스레이 검색대에서 짐 검사도 받았는데 보조 배터리가 달린 손선풍기는 반입 금지여서 맡겨야 했다. 

     

면접 자체는 크게 인상에 남는 게 없었다. (내가 면접을 잘 못 봤다는 이야기겠지). 면접위원은 총 3명이었는데 역시 세대별 대표성을 고려한 듯 40대에서 6~70대 정도의 분포. 각 면접자마다 동일한 시간을 부여하기 위해 스톱워치를 켜놓고 시작했는데 첫 질문부터 막혔다.      


사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진정성이 없구나' 반성했다. 질문은 바로 "이 위원회에 지원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였다. 이렇게 평범하고 빤한 직구가 들어오다니 ㅠㅠ. 위원회 관련 여러가지 디테일을 머리에 처넣고, 관련 분야 지식을 보여주겠노라 골몰하다가 허를 찔린 셈이었다. 그래, 뭔가 거룩한 동기가 필요했는데 그 자리에서 몇 개월이라도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어서요, 라던가 진상을 만나도 어차피 기간이 짧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요, 라든가 집에서 전철로 한 번에 올 수 있어서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첫 단추부터 잘못 낀 셈이라 더듬더듬 이야기하다 보니 대충 감이 왔다. 아, 안 되겠구나. 단 몇 개월이라도 국민의 공복으로서의 마음가짐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이후 이어진 질문을 통해서도 나와는 다른 경력(이라 쓰고 능력이라 이해한다)을 가진 사람을 원하는구나 감이 왔다. 그래도 세 분 다 다정하신 편이라 내게 할당된 15분을 알차게 때워주시고, 덕담과 함께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다시 아까 밟았던 절차를 역순으로 밟은 뒤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맡겨둔 손선풍기 찾고, 청사 건물 나가서, 면회실 건물에 들어가 비표 반납하고 신분증 찾고... 나와 정부의 짧은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      


어쨌거나 결과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면접까지 봤으니 결과가 궁금하긴 했다. 합격자 발표 예정일, 이른 오후까지 조용하다가 나라일터 채용공고란에 뜻밖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그 위원회가 올린 건 맞는데 합격자 발표가 아니라 새로운 채용공고. 뭐지 싶어서 열어보니 다른 새로운 분야 두 군데(도대체 몇 명이나 뽑는 거냐)와 함께 내가 응시했던 그 분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이전 채용공고와 비교해 보니 토씨 하나까지 같았다. 대충 심증은 가지만 한번 면접 갔던 정(?)도 있는데 좀 정확히 이야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상태로 하루가 지나간 뒤 담당 주무관에게 문자를 아주 정중하게 넣었다.   

    

     

이 문자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았다. 

"잘 아시네염. 님이 짐작한 대로에염." 하는 느낌이 '아 네...'를 통해 음성 지원되는 듯. 


순간 빈정이 상해서 다음과 같은 문자를 다시 날렸다. 


어차피 이런 말 들어봤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테지만 그냥 한번 빈정거려 보았다. 서류 접수할 때 접수증도 안 써주고, 1차 발표할 때는 생년 표기에다 이제는 딸랑 3명 면접자한테 '해당자 없음으로 되었다. 빠이' 문자 하나 날리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싶어서 그냥.. 


그랬더니 조금 오래 걸려서 문자가 다시 왔다. 

          

주어가 없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작성된 뭔가 장황한 멘트 속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에 또 욱해서 "제 생각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보내려다가 다 집어치웠다. 사실은 다시 문자 보냈다가 이번에는 '읽씹'당할까 봐, 그러면 진짜로 살짝 비참해질까 봐 그 정도로 끝냈다. 여기까지가 엄청 더웠던 여름의 어설픈 '어공' 도전기의 진짜 끝이다. 

     

경복궁역부터 광화문 언저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결국 내가 지원한 분야는 다시 전형을 시작해 서류 접수, 면접, 경력 검증, 신원조사 등의 절차를 다 마무리한 이후에 합격자 발표를 거쳐 늦가을에서야 임용되었다. 늦어진 만큼 계약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해 역시 딱 9개월. 


외부 경력자들을 대거 뽑아들여서 진행되었던 그 위원회의 사업은 국가 이벤트를 기념하고 알리는 게 주목적이라 국민들도 이렇다 할 불만은 없었고(그만큼 비례해 큰 관심도 없었지) 인건비를 포함한 예산을 소진한 후 탈없이 마무리된 것 같다. 다만 보수 성향 매체들에서 홍보비가 과도하게 책정된 내실 없는 보여주기 식 사업이라는 부정적 보도를 몇 건 내놓았을 뿐. 내가 면접 봤던 그 자리에 가셨던 분은 그 후 '근무실적을 우수히 쌓아 관련 법령에 따라 기간을 연장'하셨을까? 그랬기를 빌어드린다. 그 청사 입성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꼭 그랬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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