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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윤 Feb 28. 2023

고통 리볼빙

돌려막기 인생

오늘은 교정을 보기가 너무 싫어서, 마케팅 회의안과 표지 발주서를 작성했다. 마케팅 회의를 하면서 팀장에게 농담을 건넸다.


오늘 교정을 보기가 너무 싫어서요. 하루종일 회의안 작성했어요. 이런 걸 돌려막기라고 하나.

그러고 보니, 오늘 소윤 씨 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괜찮아요?

어쩌겠어요. 일은 해야죠.


A 업무를 하기 싫을 때는 잠시 미뤄두고 B 업무를 하며 정신을 돌리는 편이다. 마찬가지로, B 업무가 너무 하기 싫을 때는 A 업무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일을 일로 돌려막는 셈이다. 교정을 보는 와중에 스트레스를 받아 뇌가 곤죽이 될 뻔한 것을, 마케팅 회의안을 작성하면서 간신히 진정했다. 업무 리볼빙이야 뭐야. 내 얘길 들은 동생이 또다시 농담으로 받아쳤다. 업무 리볼빙.


내가 사는 방식도 거의 리볼빙에 가깝다.


고통 돌려막기.


고통이 찾아오면 더 큰 고통으로 막아내고, 기억이 치밀어 오르면 또 다른 기억으로 돌려막는다. 어떤 이별의 기억으로 견딜 수 없을 때는 또 다른 이별의 기억을 떠올리고, 이별 기억들로 괴로워질 즈음엔 비로소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는 모습을 끝없이 상상한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끝장이라서, 약을 먹고 어떻게든 자야 한다. 약을 먹고 싶지 않아 글을 쓴다.


나는 15년 동안 아팠다. 내 몸과 마음은 고통에 절어 있다. 일상 속의 사소한 기쁨으로 고통을 덮기에는 역부족이다. 나는 끊임없이 고통 속으로 마음을 옮긴다. 이 고통이 찾아오면 저 고통으로 옮겨 가고, 다시 저 고통이 나를 괴롭히면 이 고통을 끄집어낸다. 상처가 나도 치유하는 방법을 모른다. 생살을 찢어서 더 큰 환부를 만든다. 큰 고통이 작은 고통을 잡아먹는다고 믿는다.


의외로 이 방법은 나같이 고통에 전 사람에게는 효과가 좋다. 애초부터 치유법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그런 게 있지도 않으니까. 그저 고통으로 고통을 막으며 살아갈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살아오면서 만든 많은 상처와 고통에 빚지고 있다. 고통에도 효용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 그러자 처음으로 내가 고통받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예정된 불운과 고통을 받는 게 삶이라면, 과거의 숱한 고통을 돌려막으며 버틸 수 있으니까.


치과에 갔더니 이가 스물한 개 상했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서 이가 굉장히 많이 상했다고, 특히 치아 뿌리가 거의 드러난 이가 많다고 한다. 혹시 밤에 이를 악물고 주무시나요? 의사가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또다시 이를 사려 물고, 이 뿌리가 드러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오늘 밤도.


내 삶은 나쁘지 않다. 고통을 돌려막을 다른 고통들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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