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요나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나 Aug 24. 2023

《고뇌의 원근법》 서양근대미술 에세이

서경식

아무런 예비 지식도 없이 서양미술을 접한 서경식 작가는 일반적으로 미술, 하면 떠오르는 '예쁜' 작품이 아닌 철저히 현실을 직시해 추한 진실을 곧이 곧대로 그려낸 절실하고 치열한 그림들을 만난다. 서양의 근대는 곧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책에 소개된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은 이렇게  위험하고 추한 시대상을 그들의 눈동자에 똑똑히 담아 강렬하게 그려낸다. 이는 곧 증언이자 하나의 연대기다.  



여기에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p.6



저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그저 예쁘게만 마감된 한국의 근대미술에 회의와 부족함을 느낀다. 조선 역시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오로지 '예쁜' 작품만을 허용하는 예술지상주의적 모더니즘이 만연했다. 미의식은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근대국가는 국민들의 미의식을 통제하려 한다고. 저자는 우리는 그 '미의식'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곧이어 이 책을 통해 '추'가 '미'로 승화되는 예술적 순간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학살과 전쟁의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온 에밀 놀데,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카라바조, 고흐,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 등의 그림은 일반적인 의미로 예쁘지 않다. 오히려 잔혹함과 어리석음, 갈 데까지 가버린 악의 끝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서 인간의 고투와 위대함을 느낀다.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존재구나, 이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전쟁을 반복하면서 질릴 줄 모르는 인간, 그리고 그 어리석음과 잔혹함을 이렇게까지 철저히 꿰뚫어보고, 남김없이 그린 것 또한 인간이다. 말 그대로 '신 없는 시대의 제단화'이다.

p.116



고흐에 대해서 다루는 챕터는 가장 많은 장수를 할애하고 있다. 고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남기 위한 고뇌의 집념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고흐의 '원근법'에는 이상한 감각이 존재한다. 그는 원근법을 제대로 지키려고 했으나, 그림을 보는 이들은 물질을 뚫고 지나가 건너편에 가닿는 것을 느낀다. 이는 고흐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같다. 



현세를 살아가기 위한 가치관, 혹은 필수품 같은 것이 인간에게는 있는 법이지만, 고흐에게는 그런 것을 뚫고 나아가는 감각이 있습니다. 뚫고 나가는 것은 일종의 비극이지만, 인간 중에는 그런 비극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현실로 환원되거나 현실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이건 고흐의 풍경화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p.291



전근대 시대의 고뇌와는 다른 형태를 띄나, 고흐의 고뇌에는 우리 시대의 고뇌와도 비슷한 것을 담고 있다.

인간이기에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인간들. 그러나 학살을 예술로 삼을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또한 논란거리다. 저자는 1990년대가 전세계적으로 '기억의 싸움'이 벌어진 시대라고 말한다.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잊어버리게끔 하는 힘과, 그것을 파내어 기억해내는 일이 진실이라고 믿는 힘이 상충하여 격렬하게 싸워온 시대라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기억의 싸움에 의미를 더해주는 화가들의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원색적이며 호소력이 짙다.


서경식 작가의 미술에 대한 3번째 기행문이자 전작들과는 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출간한 고뇌의 원근법.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미의식의 관점에서 한 발 벗어난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 속에 존재했던, 그러나 잊혀져가는 사람들에의 기억을 되살린다. 이 책에서 미술은 단순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근대 시대의 모순과 상처를 담은 고뇌의 장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경 책방기》 도쿄의 크고 작은 서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