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몇 가지 점에서 흥미로운 전기 작가이다. 그가 다루는 주제, 그가 자신의 글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는, 역사라는 형상이 채 빚어지지도 않은 석회암 덩어리이다. 하지만 그는 시적인 문장과 참신한 해석을 통해서 과거의 인물들을 우리 앞에 생생하게 재현해낸다. 인물들에 대한 참신한 재해석이 사료와 고증에 기반 한 개연성 있는 해석이라는 것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더욱 더 감탄하게 만든다.
주로 그는 역사의 승자가 아닌 역사에서 주목받지 못한,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들에 주목한다. 츠바이크의 작품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들은 시대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거나, 역사 속에서 잊혀 지거나, 적들에 의해 매도된 인물들이다. 잘 알려진 니체는 급진적인 사상으로 인해 당대인들에게 외면 받았고, 도스토옙스키는 평생을 간질발작으로 고생한 인물이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대의 물결에 휩쓸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후 허영과 음모의 대명사로 낙인 찍혔으며, 카스텔리오는 적수에 의해 살해되어 역사의 그늘 속에 묻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다시금 새겨볼만한 가치를 자신의 인생 전체에 걸쳐서 실현한 인물들이다. 그들의 인생은 비극적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고군분투했기에 더욱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츠바이크에 의해 부활한 그런 그들의 인생은 웅장한 선율을 통해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내가 읽은, 그가 쓴 주된 전기물은 다음과 같다.
평생을 병으로 고생한 니체가 어떻게 자신의 병을 극복하려 했는지, 허약한 신체를 갖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위대한 사상을 구축할 수 있었는지, 그의 인생을 파고 든 책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니체의 비결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앎’, ‘스스로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는 예리한 관찰력’을 꼽고 있다.
또한 그는 니체의 특징으로, ‘진리에 대한 열정’을 꼽는다. 스스로를 파괴할지라도, 진리를 외치고, 정신의 고양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는 괴테와 대조되는 부분으로서, 츠바이크가 니체의 인생을 같은 독일인인 괴테와 비교하면서 서술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츠바이크의 글 솜씨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특징이 ‘얼굴 묘사’에 집약되어 있는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도스토옙스키의 얼굴을 두고, 진흙 속에 감춰져 있는 진주 같은 인상이라고 묘사한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불타오르는 눈을 갖고 있으며, 얼굴과 대조적으로 빛나는 이마가 특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이기를, 여기서 얼굴은 세속적인 것을 상징하고 이마는 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즉, 피폐해 보이지만 밝게 빛나는 이마는 현세의 슬픔을 이겨낸 정신의 승리이며, 세속적인 것(육체)를 이겨낸 정신의 승리였다.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인생 그 자체인데, 몇 년에 걸친 유배 생활, 평생을 괴롭힌 간질발작을 이겨낸 찬란한 승리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카스텔리오에 대한 책이다. “정신적 독재자이자 광신적인 주지주의자”였던 칼뱅과 그에 맞서 목숨을 걸고 “관용과 양심의 자유를 부르짖은” 카스텔리오를 대비함으로써 서술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마치 지옥의 데스매치 한판을 보는 듯 한 이 책은 두 인물들에게 치밀하게 집중함으로써, 한 편의 소설같이 독자들을 흡입력 있게 빨아들인다.
그렇지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해서 카스텔리오에게 치우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칼뱅을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훼손하는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또한 스토리가 단선적이고(단순하고), 충분히 예측가능해서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단순함 덕에 두 인물이 대비되는 효과가 명확하게 살아난다는 장점은 있다.
역사란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 책이다. 그녀가 정말로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었을까? 허영과 음모의 대명사, 욕정의 화신, 빵을 요구하는 분노한 민중에게 우유나 고기를 권했다는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러한 모든 질문들과 꼬리표들이 오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린 오해의 장막을 이 책을 통해서 벗겨내고자 한다.
왕정이 무너졌을 때, 왕국을 위해서 또한 자신과 가족의 인간적 권리를 위해서 홀로 헌신 하여 싸웠던 여자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이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츠바이크의 연민이 잘 묻어난 전기 소설이다. 특별히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한 인간이 그저 출생의 운명에 의해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는 내용을 심리학적으로 잘 풀어낸 작품이다.
그가 역사 속의 인물들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오스트리아 태생의 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유태인 탄압을 피해 런던으로 피신했다가 미국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한다. 고난의 망명생활 속에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42년 브라질에서 부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극단적 자유주의자’라는 평을 받던 그는 “나는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시대는 내게 불쾌하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유로운 죽음을 택하였다. 어쩌면 시대의 한계에 갇혀 비극적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그의 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면에서 ‘승리’를 거둔 인생이 그가 다룬 인물들의 인생과 겹쳐지는 것은 우연일까.
“정신적인 면에서 보면 ‘승리’와 ‘패배’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 때문에 언제나 승리자들의 기념비만을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서, 수백만의 존재를 망가뜨리고 그 무덤 위에 자신들의 허망한 왕국을 세운 사람들이 인류의 진짜 영웅이 아니라,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중략)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이 진짜 영웅임을 기억해야 한다.”
라는 책 속의 문구는 “다른 사람으로 위장한 자기서술”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