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하든 나와 모든 것을 칭찬하고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기
습관을 만들려면 나를 인정해야 한다. 현재 만족스럽지 못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원하는 습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인정하고 원하는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습관을 만드는 건 게다가 있던 습관을 다른 일로 바꾸는 건 대리석에 조각을 하는 일처럼 한 번에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나를 응원해야 한다. 원래 인간은 다 그렇다. 그러니 자책하거나 나를 비난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응원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거의 매일 새벽 3시 반에서 4시 반사이에 일어났다. 어쩔 때는 2시 30분에도 일어났다. 말 그대로 아침형 인간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엄청나게 노력했다. 처음에는 일어날 시간을 정하지 않고 일어나면 해야 할 행동을 정했다. 그 당시 일어나면 8시였다. 새벽시간이 집중이 더 잘되고 일의 효율이 높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나서 기상시간을 점점 당겼다. 물론 그때도 알람은 맞추지 않았다. 원래 어렸을 때도 소풍 같은 일찍 일어나야 하는 날 자기 전에 언제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 알람을 맞춘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곤 했다. 그래서 그냥 내일부터는 30분을 당겨서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면 그 시간이 되면 눈이 떠졌다. 그렇게 조금씩 당겨 새벽 3시 반에서 4시 반사이가 되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렇게 갑자기 새벽에 일어나게 된 건 절대 아니다. 나는 태생부터 올빼미였다. 학창 시절에는 특히 늦게 잤다. 가족 중에서 언니랑 동생은 잘 자는데 나만 그랬다. 괘종시계에서 종이 12번 치는걸 다 세고도 잠이 안 들었다. 게다가 12번을 다 세면 귀신이 나올까 괜히 무서워서 중간에 한 두 개는 빼고 세기도 했다. 늦게 자니 늦게 일어나서 엄마한테 혼나면서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그런데 늦잠이 허용되는 대학병원간호사로 근무를 하게 되니 엄청 편했다. 물론 새벽근무는 잠을 못 자고 출근하지만 오후 근무나 밤 근무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야말로 천직이었다. 물도 못 마시고 저녁밥은 꿈도 못 꿀 정도로 너무 바빠서 늦게 퇴근하면 새벽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술 마시는 게 일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하염없이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누워서 게임하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그제야 둔하고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개과천선했다. 이런 올빼미 중에 올빼미, 올빼미 중에서도 탑 오브 탑이었던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정말 놀라울 정도다. 하지만 이런 나를 스스로가 인정하지 못한다. 내 기준에서 기적의 아침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또한 하기로 한 모든 것을 계획한 시간만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그렇게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기로 한 것은 시각화, 레몬물 마시기, 확언, 모닝페이지, 5분 저널, 스트레칭, 명상, 글쓰기, 운동, 블로그 글쓰기와 독서이며, 장장 3시간 30분이 걸린다. 아예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 하지 않고 넘어간 적도 있고, 계획한 시간만큼 못하고 약식으로 하거나 아예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활동들이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룬 이 성취를 "넌 아직 안돼", "아직 멀었어.", "그건 제대로 하는 게 아니야"라고 깎아내리기 바쁘다. 게다가 5월은 너무 쉼 없이 달렸는지 번아웃까지 왔다.
지금 월 1회의 3개의 독서모임, 3개의 요리모임, 1개의 명상모임, 2개의 친목모임 및 주 2회 방송댄스와 주 1회 집단 상담까지 하고 있다. 아이들 등교, 등원시키고 낮동안 모임에 참석하거나 기본적인 집안일을 하고 나면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저녁준비를 하고 저녁을 먹으면 또 자는 시간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쁘다. 하지만 방송댄스나 2개의 독서모임은 오후에 하기 때문에 저녁 이후에 일과가 다시 시작된다. 다 하고 돌아오면 이미 자고 있어야 할 밤늦은 시간이다. 쉬는 시간도 없이 너무 달렸다는 생각에 괜히 누워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12시쯤에나 잠이 든다. 그래도 기상시간은 여전히 3시 반에서 4시 반. 잠자는 시간이 줄어도 너무 줄었다. 밤에 잘 못 잤으면 낮잠이라도 자야 하는데 낮잠 잘 시간도 없었다. 그러니 피로가 누적된다. 어느 날 감기 증상이 생겼다. 언제나처럼 4시에 눈이 떠졌지만 침대에서 나가지 않고 그냥 더 자버렸다. 나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안 와도 그냥 누워있었다. 그러니 또 잠이 들었고, 중간에 깼을 때보다도 더 개운하게 일어났다. 이제야 내 몸이 원하는 것을 해줬다는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내게 필요한 건 다른 것이 아닌 휴식과 잠이었다. 그래서 요새는 5시 반에서 6시에 일어났다. 기적의 아침 습관은 계속 유지했지만 초 약식으로 진행했다. 제대로 하지 못하니 나에 대한 불만이 더 커졌다.
설령 일찍 일어나 자기계발에 필요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밤에 놀던 것처럼 아침에 놀더라도, 일찍 일어난 것 만으로 충분히 잘한 거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잤고 그만큼 내 몸은 숙면을 했기 때문에 더욱더 건강해졌을 테니까. 설령 전날 놀고 늦게 잤는데도 일찍 일어났다면, 생활 패턴을 깨지 않도록 꾸준히 습관을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잘한 거다. 일찍 일어나서 원래 아침에 하기로 계획한 모든 활동을 계획한 시간만큼 다 하지 못하고 일부만 했다고 하더라도 잘한 거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당연히 잘한 거 아닌가. 마지막으로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늦게 일어났다고 해도 잘한 거다. 내 몸이 피곤하니까 더 잔 거고 그렇게 내 몸을 위한 행동을 했으면 그것도 잘한 거다. 이렇게 내가 뭘 하든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잘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100점 만점을 머릿속에 만들어 놓고 100점을 맞지 않으면 이건 실패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완벽주의. 100점만 허용하는 지독한 완벽주의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도 못하고 살았다. 인생에서 모든 일에 100점 만점에 100점을 맞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나는 100점을 맞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0점을 맞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예를 들면, 학교 다닐 때 수행평가를 한 적이 거의 없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일을 코앞에 두고 제대로 못할 바에는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하지 않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것을 내도 기본점수는 받았을 텐데, 불완전한 것을 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것조차도 내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내가 하면 100점'인데 '안 해서 점수가 안 나온 거'라고 자기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낸 수행평가 숙제가 낮은 가치를 받는다면 그건 나에게 큰 상처다. 그래서 남들에 의한 가치의 판단을 보류하고 내 속에서 내기만 했으면 100점이라며 자기위안하기 바빴다. 고작 상처가 두려워서.
나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고 아군이고 동반자다. 내가 뭘 하든 다 잘했다고 우쭈쭈 해주고 설령 잘 못했다고 해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어떤 순간에라도 나를 믿어줘야 한다. 설령 자식이 살인자라고 해도 아이에게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 자식을 오롯이 믿어주는 부모처럼. 그런 부모아래에서 자라난 아이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스스로에게 부모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를 믿어주지 않는 가혹한 부모다. 나를 믿어주고 사랑하는 내가 아니라 평가하고 판단하고 채찍질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니까 혹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살인이라도 하면 아예 인간 취급도 못 받을 거다. 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할게 뻔하다. 그러니 내 삶이 팍팍할 수밖에. 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를 내 존재자체로 믿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습관을 만드는데 가장 큰 걸림돌인 나를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뭘 하든 지지해 주기로 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잘했다고 칭찬하기로 했다. 뭐든 정말로 뭐든 말이다. 어떤 생각을 하든 잘하든 못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지 간에 아무 판단하지 않고 그냥 속으로 말하는 거다. "~했으니까 잘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러니 잘했어.", "다 잘하고 있어"라고 나에게 끊임없이 주기적으로 어떤 생각이 날 때마다 언제나 말하려고 한다. "밥을 먹으니 잘했어.", "밥을 안 먹었지만 잘했어.", "건강한 음식을 먹으니까 잘했어", "고칼로리 음식을 먹었지만 잘했어", "꾸준히 습관을 만들어서 잘했어", "습관을 만들지 못했지만 잘했어." 이렇게 정반대의 상황에서도 모든 생각의 끝은 잘했어로 끝내는 거다. 왜냐면 정말로 잘했으니까.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 거니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나를 채찍질한다고 엄청나게 큰 능률을 올리지도 못했다. 오히려 주눅 들어 아무것도 못했지. 유명한 우화도 있지 않은가. 나그네의 옷을 벗긴 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볕이라고. 지금까지 39년 동안 채찍질만 하고 제대로 완벽하게 하라고 매서운 바람만 불기 바빴다. 이제 나는 햇볕정책을 핀다. 우쭈쭈 하며 "우리 아기 잘한다~"를 해본다. 게다가 피그말리온 효과를 믿는 사람으로서, 잘한다고 믿으면 잘할 수밖에 없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그냥 상상 속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 무작위로 추출한 초등학생 20%을 지능지수가 높은 학생이라고 교사에게 설명하고 가르쳤더니 정말로 평균점수가 높아졌다는 '로젠탈 효과'를 통해 심리 법칙으로 인정되었다. 그렇게 믿는 걸 나에게 적용해 본다. 물론 계속 나를 채찍질하는 부모 자아가 나를 방해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갈길을 가련다. 이제 새롭게 살아보기로 결정했으니까.
이렇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칭찬하면 내가 만드려고 하는 습관을 만들 수 있다. 습관은 대리석을 조각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지만, 대리석 조각이 절대 할 수 없는 게 아니지 않은가. 레오나르도다빈치도 미켈란젤로도 내가 비누로도 조각하지 못하는 걸 대리석으로 조각해 놓지 않았던가. 그것도 지금도 아닌 르네상스시대에. 그러니 대리석으로 엄청 멋진 작품까지는 아니고 그냥 길만 내는 거니 충분히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다이아몬드도 깎을 수 있는데 멋진 조각이 가능한 대리석쯤이야 정말 가능하다. 그러니 판단하지 않고 그냥 내가 하는 일 지지하고 칭찬하고 나를 사랑하며 살아보자! 나는 내 편이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