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시간은 유한하다. 정해진 할당량이 있다. 내가 원한다고 고무줄처럼 무작정 늘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해야할 일이 있다면, 모든 건 해야 마무리 된다. 하지 않는다고 갑자기 획기적으로 해야할 일의 시간을 줄여주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거다. 그렇게 인생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놀고 나서 닥쳐야 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고, 먼저 하고 노는 사람이 나머지 사람이다.
그렇다 나는 전자이다. 놀고 나서 닥쳐야 하는 사람 말이다. 왜그렇게 하기가 싫은지. 귀찮아서 미루고, 바빠서 미루고, 하고 싶은 기력이 없어서 미뤘다. 그리고 놀았다. 아주 자유롭게 행복하게 놀았을까? 절대 아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어하면서 놀았다. 놀아도 노는게 아니었다. 이건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심리학 용어로 '자이가르닉 효과'라고 있다. 미완성인 것은 완성이 될 때까지 마음속에 남아서 영원히 나를 괴롭힌다는 뜻이다. '자이가르닉 효과'의 큰 예시는 큰 사건을 겪고 그 사건을 치유하지 못하고 계속 고통속에 살게 되는 외상성 트라우마 장애인 PTSD를 들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일을 끝내지 않았다는 트라우마를 만들며 놀고 있었다. 나중에 해야 더 잘된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나중에 하면 잘 되긴 한다. 당장 이걸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아드레날린을 짜내가면서 결과물을 만드니 잘 안될리가 없지, 게다가 시간도 엄청 단축된다. 근데 그 만큼 내 수명은 갉아먹고 있던 것이 아닐까? 이게 바로 PTSD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스스로 병을 만들고 사는 거다.
극강의 P, 무계획인 인간이라 계획적인 삶은 나를 올가미로 가두는 것처럼 괴롭혔다. 계획을 세우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일들을 해치우면서 살아왔다. 다이어리는 써본적도 없다. 기록 자체를 싫어했다. 수업시간에 필기도 안했다. 기억할 수 있다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면서. 뭣도 모르고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진짜 자유라고 생각했다. 미뤄온 일들에 대한 대가로 우울감, 자존감 하락, 자기 비하를 받아오면서. 그렇다고 바꿀 마음도 없었다. 바꿔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기전까지.
아이를 낳고 아이가 나처럼 자라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가 나처럼 고생하면서 살고 싶길 바라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해야지'하며 걱정과 고민만하고, 놀아도 노는 게 아닌 삶을 사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내 아이를 사랑하니까 아이에게 좋은 습관을 물려주고 싶었다. 좋은 습관이 뭘까 고민했다. 결국 방법은 한 가지. 내가 제일 못했던 계획적인 삶을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해서 30년동안 제멋대로인 삶을 살다가 스케줄러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스케줄러를 쓰기로 한 것도 충동적이었다. <일독일행 독서법>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환전 흙수저에 문제아였던 저자가 인생 역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뿜뿜 차올랐다. 이게 <역행자>에서 말하는 자의식이 해체되는 순간이다. '저 사람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리 없다.' 라는 마음으로 <일독일행 독서법>의 저자 유근용 작가님이 쓴 스케줄러인 <아들러 라이프로그 북> 구매했다. 만년형 스케줄러라 남는 페이지 없이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었다. 6개월간의 스케줄러라 1년간 다 써야한다는 마음의 부담도 없었다. 마침 연말이라 더더욱 살 핑계거리가 좋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계획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스케줄러는 고역이었다. 충동적으로 그때그때 생각난 일을 처리하며 살았는데, 스케줄러는 오늘 무엇을 할 지 미리 적어야 한다. TO DO LIST. 해야 할 일 목록을 적는 것이 가장 앞에 있다. '맙소사. 뭘 할지 미리 생각하라고? 정말? 리얼리? 그런거 해본 적 없는데 어떻게 하지?' 근데 스케줄러를 산게 아까워서 한번 적어봤다. 전날 뭐할지 적거나 아침에 일어나서 뭐할지 해야할 일 몇개만 적어봤다.
물론 해야할 일을 지킨 적도 있고, 지키지 못한 것도 있다. 미루고 미루고 또 미뤘지만, 자꾸 미루면 또 투두리스트칸에 새로 적는게 귀찮았다. 그래서 한 두개 하기 시작했다. 순전히 다시 투두리스트 칸에 적지 않겠다는 귀차니스트의 마음으로. 보통 해야할일을 하는 시간은 하루 일과가 마치는 12시였다. 어쨌든 하루에 하기로 한 건 했다. 처음에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니 투두리스트에 적혀 있는 것들을 하루 종일 '해야 하는데...'생각만하며 나를 괴롭혔다. 스케줄러를 쓰니 해야할일이 생겨서 더 힘들었다. 방법을 바꿔보기로 했다. 투두리스트를 오전에 하기로. 할게 있으면 오전에 시간을 내서 하기로.
오전에 하고 싶은일을 끝내놓으니 천국이 펼쳐졌다. 이제야 비로소 노는게 진정한 노는게 되었다. 할거 다 하고 노니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것을 대략 40년의 세월동안 마음에 족쇄를 채우고 살았다는 게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지금도 모든 할일을 오전에 하지는 않는다. 사실 아직도 많은 것을 오후에 한다. 그래도 꼭 중요한 일은 하루가 시작했을 때 미리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내 정신건강에 좋으니까. 예를 들면 기적의 아침 루틴인 물 마시기, 스트레칭, 시각화, 확언, 명상, 모닝페이지, 5분 저널, 독서, 명상이다. 이건 루틴으로 만들어서 할 때 해야한다 생각없이 빠르게 한다. 이렇게 미리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계획한 일을 하루가 시작하자 마자 하면 낮이 되기 전에 해냈다는 성취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그럼 더 이상 PTSD의 감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놀기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