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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Feb 16. 2024

추억하고 싶지 않은 고향

내 이야기에 시골을 담은 것이 많다.

물론 내가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다닌 고향이지만 나도 썩 좋은 추억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나마 같은 시절을 같은 곳에서 공유했던 친구들이 있으니 견딜 만한 것이지 않을까?

예전 고향은 정말 지옥스럽다 할 정도로 진흙과 가난으로 도배된 곳이었다. 해서 많은 동향 사람들이 출신지를 아예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 동네는 여름엔 뙤약볕과 벌레 그리고 무료한 시간으로, 겨울엔 강풍과 눈보라 그리고 얼어붙은 땅과 사물들의 땅이었다. 겨울철에 눈비라도 내리면 한 달 가까이 젖은 땅이 되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고, 여름 우기에도 늘 마르지 않는 진흙땅이 되어 그 동네는 사람들은 잔칫 날이어도 사람답게 치장을 하지 못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그 마을. 옷과 신발은 검고 누런 흙으로 덕지덕지 늘 묻혀 살고, 패션의 기본은 장화로 대변될 수 있었다. 아마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듯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마을과 같이 4륜자동차가 진흙에 빠져 바퀴가 돌면 돌수록 진흙의 무름은 심해지고 무름의 범위가 넓어져 갈수록 차는 개미지옥에 갇힌 듯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개인의 생각마저도 진흙에 빠져 옴짝달싹 못했던 것 그런 장소 같다.


여름엔 모기와 벌레들이 가득하고 밤에 방에 전깃불이라도 켜면 아무리 모기장을 두텁게 쳐 놓아도 대수롭지 않게 수많은 벌레들이 형광등 주변과 천장에 한 가득이 되었다.

여름밤더위는 정말 곤혹스러웠다. 늦은 밤에도 열대야와 습한 바람으로 땀은 비 오듯 해 부채를 하나씩 든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안마당이나 집 앞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사각 모기장 틀 안에서 밤을 보내기도 했는데  같이 마당에서 자고 싶지 않아도 모기장틀이 하나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도 크게 없었다. 밤이슬 맞지 마라 하는 말이 있는데 나의 밤이슬 맞기는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지 싶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기 전부터 밭이나 논에 불려 나가거나 집안일을 돕는 것은 내 또래 아이들에게 군입대와 같이 비슷한 의무였다. 마늘 수확이나 마늘종 뽑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고, 벼 논에 농약을 주기 위해서는 펌프질을 하고 분사기에 연결된 호스를 넣어주고 끌어당기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이 달려들어야 했다. 모내기도 벼 베기도 기계화되기 전이어서 논에 밥을 내거나 짐을 나르는 정도의 것에는 아이들의 손을 많이 필요로 했다. 물론 집안일을 돕지 않고 있다고 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평안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은 혹은 형제가 일 하고 있는데 내가 안 하고 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질 리 없기에 말이다. 그런 수고스러움이 없으면 간식을 배정해 먹는 것도 송구스럽고 또 인위적으로 적은 양이 배정되기도 하기에 말이다.

공정함은 어디에서나 항상 있어야 하는 데 적어도 아이들은 공정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왕왕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아이들이 놀만한 것이 정말 없었다. 땅을 파고 소꿉놀이를 해도 마당이 상한다고 제지를 당했고 그나마 벼 수확이 끝난 일꾼들의 발자국이 그대로 파여 있고 벼 꼬투리가 남아 있어 뛰어놀기 불편한 논에서 놀기라도 하면 논바닥이 딱딱해진다 논둑이 무너진다 하며 제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아이들이 놀만한 곳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외지에서 주산학원을 했던 이가 마을 회관에 주산학원을 차렸다.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아이들의 능력이 그렇게 우수했었는지 체험적으로 느끼게도 해주었다. 저 아이가 저렇게도 암산을 잘한데 하며 말이다.  


어느덧 고학년이 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교과테스트도 많이 했는데 테스트는 학습지 메이커에서 일괄적으로 구매해서 사용했다. 읍내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학습지 메이커와 비슷한 이름의 서점 서너 곳이 있었다. 또 학교를 각종 책자를 판매하려는 이가 학교 측의 허가를 얻어 단체로 책을 주문받아 가기도 했다. 가끔 반별로 담임선생님의 주관 아래 단체로 구매한 책에서 장학퀴즈 형식의 테스트가 벌어지기도 했다.


일반도서 이외의 경우에도 정상적인 선택구매가 힘들었다. 아이들은 자기 성향에 맞는 학습지로 공부하고 싶었지만 학교는 학교가 정한 학습지만을 공통적으로 이용하도록 강요했다. 테스트의 통일을 위해서라지만 구매의 통일 이외에 다른 것은 별도로 발생되지 않았다. 그러함에 당시 반장 부반장 아이들이 읍내 서점에 가 학습지가 학교 공동구매목록으로 올라간 연유를 파악하기도 하고 담임선생님에게 이의 제기도 한 듯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짓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심한 매타작을 당하기도 했다. 리베이트가 의심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70년대에 없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학습지 2개를 구매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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