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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훈 Nov 12. 2024

먹고 마시고 즐겨라.

술에 취하면 술주정을 하고, 술주정의 결과물은 들은 처참한 지경이 되었다. 사극 드라마에서 많이 보는 장면인데 주막 안의 살림살이 들이 깨지고 부서지는데 술주정을 한 이는 배상하기 힘든 처지의 삶을 살아가는 농투성이 거나 한량이 대부분이었다.  

    

마시는 즐거움이 피지배층에게 있었을까?

고급 술집에서 난장을 벌였다면 더욱이 그렇다. 술 마실 기회를 이 세상을 떠나 제사상에서나 겨우 술 냄새를 맡는 것으로 술과의 인연을 끊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먹고 마시고"까지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20세기에 들어와서나 겨우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을 것 같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집의 가장 되는 이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술의 재료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막사발채로 혹은 주병채로 들이켜 어떻게 보면 술맛보다는 배를 채우기 위해 마시는 것처럼 하는 모습이 이해되기도 한다. 유희가 아닌 생존을  위한 먹는 행위와 동일시되었다는 것도 납득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피지배층의 경우 아마도 태초부터 그랬지 싶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이들의 술잔은 크다.

보통 큰 잔을 사용해서 마시는 부류는 상류층 보다 하류층이 더 많다. 문헌적으로 연구된 것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통상 주변 환경에서 접한 상황을 비교해 보면 낮은 도수의 서민술을 마실 경우가 높은 도수의 고급주를 마시는 경우보다 사용하는 잔이 크다.      

물론 최근 하이볼을 만들어 마시는 하이볼 잔이나 향을 맡고 느끼기 위해 둥그렇게 만들어진 와인잔 등은 큰 편에 속하지만 통상의 경우에는 저도수의 술은 큰 잔에다 높은 도수(양조기술의 단계가 더 복잡)의 술은 큰 잔에 마시면 빨리 취하는 것도 취하는 것이지만 만들기도 쉽지 않고 귀해 불가피하게 잔이 작아질 필요성이 있다. 그 때문에 잔이 크다는 것은 배고픔을 동시에 해결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맥주잔도 그렇고 막걸리 잔으로 사용되는 사발 역시 크다. 여기에 더해 제조과정이 심오한 술은 일반 백성이 쉽게 접하기도 어렵고 함부로 마시는 것도 제한된다. 우리네 양반 가에서 증류주인 소주를 만들 때 보면 불을 과하게 땔 경우 소주에 불 맛이 강하게 나기 때문에 가장 질 좋은 가양주를 얻는 데는 고단함이 단단히 배어 있다. 그래서 겨우 얻은 적은 양의 술은 고이 보관하다가 제사 때나 겨우 사용하곤 했다.     


암튼 마신다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궁핍한 피지배층이 “마시고 즐기기”라는 것은 아마도 국가적인 대축제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싶다. 여태껏 나는 “먹고 마시고 즐기라”는 의미를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다. 그러면서 그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쉽지 않았던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선진국에서 태어난 이들이야 양자를 굳이 구별하지도 않았고 습관적으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동시에 이행관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옛말이나 고전 등에서 등장하는 “먹고 마시고 즐겨라” 하는 문장은 정말 쉽게 사용했던 단어가 아닌 듯하다. 지위가 높거나 신분이 있는 집의 잔치에서나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성경을 보자.

요한복음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보면 포도주가 떨어져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포도주가 떨어질 정도로 많은 이들이 큰 잔을 사용해 먹는 것을 대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다.      

그렇지만 내가 알기로는 로마가 지배하는 중동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것은 로마군단의 상급자들만 가능했었다. 그 귀한 포도주를 일반 백성의 혼인 잔치에 쉽게 마시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원래부터 적게 준비하지는 않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나 동료들 중 부유한 자가 많지 않았다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받아 간 집 역시 부유한 집이 아니라고 판단도 했다.     

어쨌든 요한복음에 나오는 카나의 혼인 잔치 몇 구절을 보자    

 

이런 일이 있은 지 사흘 째 되던 날 갈릴래아 지방 카나에 혼인잔치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도 그의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고 와 계셨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다 떨어지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

유다인들에게는 정결 예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그 예식에 쓰이는 두세 동이들이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다.

예수께서 하인들에게 "그 항아리마다 모두 물을 가득히 부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여섯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자

예수께서 "이제는 퍼서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어라" 하셨다. 하인들이 잔치 맡은 이에게 갖다 주었더니

물은 어느새 포도주로 변해 있었다. 물을 떠간 그 하인들은 그 술을 어디에서 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잔치 맡은 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술맛을 보고 나서 신랑을 불러

"누구든지 좋은 포도주는 먼저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다음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 법인데 이 좋은 포도주가 아직까지 있으니 웬 일이오!" 하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우선 복음에서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시는데 바꾸는 양이 두세 동이들이 돌항아리 여섯 개정도로 나온다. 한 동이로 마실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보면 어떤 이는 막걸리 한 동이를 혼자 양껏 들이키다는 표현도 종종 보았으므로 막걸리 마시는 느낌으론 네 사람 정도가 한 동이를 들이켰다 치고, 돌 항아리 한 개당  세 동이 정도면 12명 정도, 그것이 여섯 개이니 100여 명 안쪽일 것이 분명해진다. 더구나 예수와 마리아가 한 곳에 있을 정도로 마을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참석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리고 도수가 높지 않은 포도주를 큰 잔에 마셨다고 본다면 마시고 즐겨라는 부문은 정말 최소한의 음주량일지 모르겠다. 다시 맥주 잔으로 분석해 보면 5백 밀리리터 맥주 한잔을 기본으로, 한 동이를 10리터로 가정한다면 돌항아리 6개는 많아야 180리터이고 1인당 맥주 한 잔 정도 마신다면 360명의 사람이,  1인당 석 잔 정도 마신다면 1백여 명 정도가  마실 수 있는 양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예수의 어머니가 그 집 하인들에게 명령하는 것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남의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고 하는 것이 잔치집 주인의 모습과 흡사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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