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positive, and your dad is also positive."
열흘 간의 가족 여행을 끝낼 무렵, 즉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 아빠와 나는 코로나에 확진 되었다. 다행히도 몸이 약한 엄마는 음성이었다. 취리히 북쪽 Oerlikon 역 앞에 있는 코로나 검사소의 풍경이 아직도 떠오른다. 6월 초의 햇빛과 푸른 하늘, 그리고 봄바람은 훅 하고 불었다. 살짝 쌀쌀하지만,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사실 그날 아침에 루체른에서 스냅 촬영이 계획되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목이 칼칼해서 혹시나 싶어 간이 키트로 검사했다. 너무나 선명한 두 줄이 용액을 떨어뜨리자마자 나타났다. 바로 스냅 촬영 작가에게 취소 연락을 드렸고, 부모님 방에 가서 코로나 검사가 급하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휴일에 영업하는 간이 검사소는 취리히에 있었고, 우리는 루체른에서 바로 취리히로 갔다. 그날따라 하늘은 어찌나 맑고 예쁘던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청명한 날씨였다. 스위스를 여행할 때 날씨 운이 기가 막히게 좋았는데, 아마 운을 다 날씨에 써서 그럴까?
간이 검사소에서 공식적인 확진 증명서를 받는 순간, ‘상사에게 어떻게 말씀드리지’ 하는 직장인의 마인드가 구현되었다. 아빠는 믿을 수 없으니 검사를 다시 하자고 했고, 엄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2022년도 6월, 당시 질병관리청 규정상 해외에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 10일 후에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빠르게 날짜를 손으로 헤아려보았다. 아빠랑 나는 입국할 수 있는 날짜는 6월 17일.
그 다음날 엄마는 무조건 한국에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으나, 엄마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차마 아빠랑 나를 두고 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우시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울고 싶은 사람은 나야. 10일 후에 엄마가 코로나에 확진 되면, 그때 난 스위스에 더 있을 수 없어. 나도 잘리지 않으려면 그 이후에는 회사 가야 해. 그리고 엄마랑 아빠 둘이 여기 있는 것 보단 말 통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편이 더 낫다"라고 설득했다. 엄마는 그제서야 눈물을 닦으셨고, 착잡한 표정의 아빠를 바라보며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하며 마지막 가족 식사를 하러 역 앞에 있던 식당에 들어갔다. 밥을 시켜도 먹는 둥 마는 둥, 일단 오늘 하루의 숙박을 위해 가장 가까운 호텔을 찾아서 예약했고, 호텔에 체크인 하자마자 아빠와 나의 비행기 티켓을 오픈 티켓으로 바꾸었다. 하필 그날이 일요일이었고, 그 다음날은 스위스 공휴일이어서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Seebach supermarkt는 문을 열었다. 거기서 일단 저녁거리와 다음날 먹을 수 있는 아침 거리를 간단하게 사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의 짐 정리였다. 짐 정리라고 고상한 표현을 붙였지만, 사실상 내용물 약탈이었다. 엄마가 가지고 있던 상비용 약, 처방받은 항생제와 소염제, 화장품, 멀티 쿠커, 홍삼 스틱부터 실크 스카프까지, 최대한 많은 생필품들을 빼두었다(실크 스카프는 여행 내내 탐을 내고 있었던 나의 사심이었다). 엄마는 다시 우시기 시작했다. 혼자 갈 수 없고, 말도 안 통하는데 환승은 어떻게 하겠냐는 걱정이었다. 최대한 엄마를 달래면서, 아빠랑 나는 엄마의 짐 정리를 도왔다. 그리고 언니한테 연락해, 강아지를 언니 집에 10일 정도만 더 데리고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6월 6일, 원래대로라면 온 가족이 한국에 귀국해야 하는 날, 아빠와 나는 엄마의 짐을 들고 취리히 공항으로 향했다. 엄마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망연자실하셨고, 그런 엄마를 최대한 달랬다. 그리고 이별의 순간, 아빠와 엄마 두 분이 동시에 눈물을 터뜨리셨다. 나는 우리가 평생 못 보는 게 아니라 10일동안만 잠깐 있는 거니 걱정 말고 가라고 엄마 등을 떠밀었다. 아빠는 엄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잠깐만 앉아있자고 하셨다. 아빠는 딱딱한 공항 벤치에 앉아 눈물을 훔치셨다. 아빠도 내심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싫으셨고, 막막하셨던 것 같다.
나는 아빠한테 말했다. “아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아빠 한 때 미국 이민도 생각 했잖아. 이민 체험기라고 생각하자. 우리가 언제 이렇게 가장 물가 비싼 나라에서 2주동안 살아보겠어?” 하며, 공항 다음 목적지인 취리히 근처 셀프 빨래방, Lea’s Waschaus로 향했다. 여행 막바지여서 옷은 꼬질꼬질해졌고, 적어도 사람 답게 생활하려면 빨래가 너무 필요했던 것이다.
공휴일이라고 모든 빨래방이 다 문을 닫았으나, 운 좋게 Lea’s 만 문이 열려 있었다. 세탁을 마치고 아빠와 내가 향한 곳은 아시아 마트와 일반 마트였다. 한동안 한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꼭 밥이 필요하신 분이었다. 아시아 마트에서 아빠가 드실 스시용 쌀과 계란, 내가 먹을 오렌지 주스와 빵을 샀다. 일반 마트인 Coop에서 샴푸, 바디워시부터 여성용품을 사야 했다. 새삼스럽게 여자로 사는 건 참 귀찮고 피곤하고 돈이 많이 드는 것이다. 아빠는 호텔 화장실에 있는 all in one 샤워젤로 다 해결되시는 분이었으나, 부위별로 다 다른 세정제를 써야 하는 나로서는 꼭 필요한 지출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련의 생필품을 사서, 숙소에 다시 들어오니 오후 4시쯤 되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상사에게 문자를 드렸다. 해외에서 코로나 확진이 되었지만, 업무에 지장이 없게 하겠다고.
그리고 약 2주동안 스위스를 떠나기 직전까지, 밤 12시가 되면 일어나서 회사 노트북을 들고 호텔 로비로 가서, 업무를 했다. 그리고 아침 9-10시, 근무시간이 끝나면 방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 시점에서 급하거나 바쁜 일들은 발생하진 않았다. 코로나 확진시 사용할 수 있는 유급 휴가는 있었지만, 이미 자리를 오래 비웠기에 차마 쓰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