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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치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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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고 Jul 23. 2024

수치의 생 2 - 심해어 1

몇 년 전에 만났던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에게서 지독한 연민을 느꼈다. 그를 바라볼 때마다 고통스러웠으며 혼란스러웠다. 조금은 그를 이해하고 싶어 글로 남기다가 소설을 빙자한 수기를 한 편 쓰기로 했다. 초고를 쓰고 나서 퇴고를 진행하지 못했다. 허접한 소설에 수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벌써 5년이나 습작 폴더에 묵혀두었다. 이런 식이 아니라면 영원히 묻혀 있을 거 같아 수치의 이름을 빌려 쓰레기 같은 초고를 올려 본다.





겨울을 코앞에 둔 가을날, 코끝에는 차가운 공기가 닿았고 미처 치우지 못한 낙엽들은 행인들에 의해 바스락 소리를 냈다. 마음은 공허하고 영문 모를 이유로 숨은 가빴다. 콧구멍에서 삐져나오는 날숨이 차가운 공기와 만나 하얗게 피어났다.


지금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첫차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전 후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후배는 내가 일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는 걸 걱정했다. 밖에는 나가고 싶지 않고, 최소한의 생계 비용은 필요해 몇 달째 재택 아르바이트로 연명했다. 바이럴 마케팅 블로그에 올릴 원고를 작성하는 일이었는데 만 오천 자에 육천 원을 줬다. 하루 종일 키보드를 두드려대도 손에 들어오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저 사는 데만 목적을 다했으니까.


형,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 이거 일당 세다니까 며칠만 일해도 형 지금 하고 있는 그 재택보다 훨씬 나을 거야. 나랑 같이 하자.


후배는 이직을 위해 두어 달 휴식기를 가지고 있었다. 쉬고 있다는 사실만 놓고 본다면 우리 둘은 같은 처지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후배의 휴식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었다면, 나의 휴식은 가라앉기 위함이었다.


돈을 벌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벌리는 듯했다. 세상엔 돈을 쓰고 싶어 안달 난 사람과 돈이 필요해서 안달 난 사람이 넘쳐났다. 행사 기획업체들은 단체나 기업에서 진행하는 행사의 운영을 도맡았다. 행사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미리 준비해 놓고 찍어내듯 행사를 만들었다. 필요한 비용은 단체나 기업에서 대고, 업체는 운영비와 행사의 규모에 맞춰 인력을 투입시켰다. 후배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꿀만 빨다 오는 거라고 했다. 후배가 소개한 카카오톡 행사 인력 구직방에 참여했고, 그중에 제일 괜찮아 보이는 행사와 업체를 택했다.


단기로 하는 일이었지만 이것도 고용 계약이기 때문에 법을 준수해야 했다. 세금도 떼었고, 휴게 시간도 지켜야 했다. 업무는 간단했다. 외국계 자동차 회사에서 신차 발표를 위한 행사를 개최했고, 그곳에 오는 손님들이 차를 한 번씩 보고 나면 그 차의 먼지를 닦아내면 되는 일이었다. 자동차 먼지 닦는 일로 사람을 다섯 명이나 뽑은 것에 놀랐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현저하게 낮은 업무 강도였다. 우리가 담당했던 차량은 모두 세 대, 우리는 밀어내기 방식으로 근무를 서기로 했다. 한 사람이 삼십 분씩 한 대의 차량을 맡고, 삼십 분이 지나면 다음 차량으로, 삼십 분이 지나면 그다음 차량으로, 그리고 나면 한 시간을 쉬기로 했다. 한 시간 반 동안 근무를 서면 한 시간의 휴식 시간이 생기는 셈이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일주일 짜리 행사에 먼지 닦이들은 꽤 친해졌다. 한 시간이나 되는 휴식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구직에 목마른 청춘들이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일한 지 이틀 만에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네 명, 먼지 닦이는 총 다섯이었는데 하나가 비었다. 행사 첫날부터 겉돌던 녀석이었다. 왠지 그 녀석을 보면 심해어가 생각났다.


녀석은 왜소한 체구를 콤플렉스로 여기는 듯했다. 자신의 작은 몸을 감추기 위해 항상 상반신을 부풀렸다. 복어처럼 보이기도 했고, 아니면 다른 어떤 못생긴 물고기 같았다. 늘 가슴을 과하게 내밀고 목을 쭈욱 뺐다. 뭐든 과하면 미관을 해치는 법인데 녀석의 몸 부풀리기가 꼭 그랬다. 유행이 한참 지난 뿔테안경 너머에는 커다란 눈이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매부리코에 콧대가 꽤 높은 편이었는데 얼굴만 봐서는 꽤 미남인 편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자신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몸을 부풀리는 데만 최선을 다했다. 녀석은 아무래도 잘하는 게 몸 부풀리기 말고는 없는 듯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녀석에게 힐난을 시작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나요? 왜 다들 알아듣는데 왜 그쪽만 못 알아 들어요? 이게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진짜 일 쉽지 않아요? 네?


먼지 닦이들을 통솔하던 직원이 녀석에게 질려버리고는 내게 하소연을 늘어놨다. 직원 말이 맞았다. 정말이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먼지만 잘 닦으면 되었고, 누군가 할당된 일 이외의 것을 요구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안내해 주면 그만이었다. 짜인 틀에 맞춰 필요한 일을 분배하고 일용직 인력들을 부리는 데만 수년의 경력을 쌓아온 직원이 녀석과 일하는 것에 어려움을 표하고 있었다. 직원은 자꾸만 돌발행동을 해대는 녀석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자꾸만 의견을 묻는 통에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형, 그 사람 진짜 너무 짜증 나요. 말은 하는데 벽에다가 혼자 지껄이는 느낌이라니까요.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먼지 닦이는 자기보다 서너 살 많은 녀석의 어리숙함을 못 견뎌했다. 교대 시간에 몇 분씩 꼭 늦는 녀석에게 화가 잔뜩 쌓여있었다. 자신 보다 연장자라 말하기가 어렵다며 우는소리를 해대는데 영 듣기가 싫어 순번을 바꿔주기로 했다. 처음엔 녀석을 나무라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녀석을 대면하고는 그 마음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아, 죄, 죄송합니다. 예, 예......


순번을 바꿔주고 녀석과 휴게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녀석은 전화기를 붙잡고 허공에다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억울한 일이라도 있는지 울상을 지었고, 늘 부풀리고 있던 몸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몇 분을 더 머리를 조아리던 녀석이 전화를 끊자마자 탄식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시, 시발 새끼. 시, 시발, 시발.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녀석은 소리 없이 한참을 울었다.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좀 도와드려요?


녀석은 나를 경계하는 듯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을 향한 관심에 어찌할 바를 몰라한다는 편이 나았다. 호의를 보이려는 내게 일그러진 표정을 보였는데, 불편해한다기보다는 어색해하는 듯했다. 우리는 꽤 오래 말이 없었다. 시선을 맞춰보려 했지만 녀석은 눈빛에 모든 비밀을 감춰둔 양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파르르 떨리는 동공에서 느껴졌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제멋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그 기준으로 사람을 대했다. 단기 아르바이트에 고학력 고 스펙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서열을 나누고 싶어 했다. 며칠 사이 녀석의 어리숙함은 하대의 이유가 되어있었다. 본능적으로 녀석은 사람들의 하대에 경계심을 가졌다. 호기심 반 동정 반으로 호의를 베풀려는 내게도 녀석은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 아,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 저, 저는 괘, 괜찮습니다.


가까스로 말을 마친 녀석이 갑자기 으허, 으허, 으허 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건 녀석의 웃음소리였다. 숨을 헐떡이는 듯한 녀석의 웃음소리는 뭍에 올라온 물고기의 힘겨운 아가미질 같아 보였다. 어쩐지 그 웃음이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에요? 말해 봐요.


녀석은 애초에 물음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녀석은 내게 일그러진 얼굴 위로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동정을 빙자한 호기심을 타오르게 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요. 누가 돈이라도 떼어먹었어요?


아,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


삐죽삐죽 입술을 움직이는 녀석의 시선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우리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툭툭 끊어지는 대화, 우울한 얼굴, 녀석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몰려왔다.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침묵 끝에 녀석은 다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웨이트 트레이닝에 취미가 있던 후배의 커다란 몸은 운동하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무게는 얼마나 치냐, 몸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렸냐 하는 식의 질문들로 행사 초반부터 시달렸다. 먼지 닦이들의 시끌벅적한 퇴근길에 떡 벌어진 후배의 어깨를 보고는 생각했다. 녀석에게는 후배가 더 잘 먹히겠다고.


후배에게 녀석 이야기를 했다. 덩치가 내 두 배쯤 되는 녀석이 감수성도 내 두 배쯤 되는 듯했다. 금세 이야기에 빠져들어 녀석과 대화를 한 번 해 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녀석이 분명 마초적인 후배에게 매력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후배가 녀석의 뒤로 가도록 순번을 짰다. 후배는 하루 동안 녀석과 대화하면서 많은 것을 알아냈다. 녀석은 서너 달 전부터 행사 업체 아르바이트를 해 왔던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고향에서 일을 하다가 일터에서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 상경한 거라고 했다. 그 사람은 녀석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머무를 곳을 마련해 줬고, 때마다 도움을 주고 있다고도 했다.


형, 근데 얘 말하는 게 앞뒤가 안 맞아. 게다가 말이 너무 어눌해서 뭔 소리 하는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니까.


후배가 말하기를 녀석이 하는 말에는 무언가 빠져있고, 그걸 되물을 때마다 말이 조금씩 바뀐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것 같다는 게 후배의 의견이었다. 감정적인 후배는 녀석의 처참한 과거를 예측하면서 언성이 높아졌다.


나를 경계하던 녀석은 후배에게 마음을 열고난 뒤로 내게도 마음을 열었다. 며칠간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아냈다. 녀석의 아버지는 공무원 출신으로 퇴직 후에는 소소하게 사업을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전업주부라 보통은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형이 하나 있는데 대화도 자주 한다는 걸 보아 사이가 좋아 보였다. 특별할 것 없는 가정이었다.


녀석은 대학 시절을 소회 하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조교의 불합리한 처사 때문에 졸업하지 못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눈물을 참아내느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교수의 중재로 조교와 화해한 뒤로는 교수의 도움을 받아 졸업을 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녀석은 무엇이 불합리했고, 어떻게 화해를 한 건지,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군 시절에는 지독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선임들 대부분이 가만히 있는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혼을 내고, 모욕을 주었다고 했다. 간부들에게까지 같은 취급을 받아다는 것을 봐서는 복무 기간 내내 녀석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선임들을 향한 욕이 끝나자 대상이 불분명한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시작되었는데, 한참 후에야 그 대상이 후임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난의 내용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를 무시했다, 내 뒤에서 욕을 했다, 하는 것들이었다.


혀, 형님들은 조, 좋은 분들이잖아요. 혀, 형님들에게 피, 피해가 갈 거예요.


녀석과의 대화에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의문이 가는 게 있다면 여러 번 되물어야 했는데, 보통이라면 십 분이면 끝날 대화도 녀석과는 이, 삼십 분이 걸렸다.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해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녀석의 말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차분하고 침착한 분위기로 절제된 언어를 쓰려한다면 녀석은 배려 뒤에 숨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필요한 말을 집어삼켰다.


녀석은 의외로 성실했다. 누구보다 먼저 일터에 왔고, 누구보다 늦게 일터에서 떠났다. 나는 녀석의 성실함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다.


혀, 형님, 커, 컵라면 안 드세요?


업체에서 아침 식사 대신으로 준비한 컵라면과 단팥빵에 물린 내가 할당받은 몫을 가방 위에 던져두자 녀석이 뱉은 말이었다. 그제야 녀석의 비쩍 마른 몸과 불룩 튀어나온 배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가장 먼저 와서 컵라면을 먹고, 남은 컵라면을 사수하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였다. 나중에 직원을 통해 들었는데 녀석이 퇴근 때마다 남은 단팥빵을 챙겨간다고 했다.


행사 기획업체는 늘 일할 사람을 필요로 했다. 업체 팀장이 나와 후배에게 일 년 정도 계약하고 일을 하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후배는 이직을 준비 중이었고, 나는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기에 거절했다. 아쉬워하던 팀장이 녀석에 대해 언급했다. 같이 일해 보니 어떤 사람인 것 같냐며 녀석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어 했다. 후배가 녀석을 최대한 포장해서 말했다. 팀장 역시 녀석에게 측은지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의 평가를 참고했다기보다는 자신의 동정에 의미를 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이 주 뒤에 있을 행사에 녀석에게 일을 주기로 했다.


후배와 나는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도 녀석을 궁금해했다. 며칠에 한 번씩은 녀석 이야기를 했다. 잘 살고 있는 걸까, 도대체 녀석의 삶은 어떤 삶인가, 우리는 녀석 없이 녀석의 하루를 추론했다.


임금이 입금되기까지 일주일가량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먼지 닦이들은 행사 기간에 사용했던 단체방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행사 기획업체에서 통장 사본이나 신분증 같은 증빙자료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지나자 팀장에게 임금이 입금되었을 거라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팀장은 검은색 경량 패딩을 찾고 있다는 메시지를 함께 남겼다. 고가의 아웃도어 브랜드의 옷이었다. 그 패딩은 행사 기간 내내 녀석이 입고 있었다.


후배가 녀석에게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늦가을 쌀쌀한 날씨에 방한복 하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녀석에게 팀장은 자신의 옷을 빌려주었다. 호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받기는커녕 손해를 끼친 녀석에게 팀장은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녀석은 억울해했다. 패딩은 다 사용한 뒤에 벗어서 휴게실에 잘 두었다고 했다. 팀장은 왜 옷을 자신에게 주지 않았느냐 따져 물었고,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팀장은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의 책임은 묻지 않겠다. 다만 앞으로 일을 같이 하지는 못할 것 같다. 후배는 녀석의 상심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 같다고 했다.


패딩을 잃어버리고 일거리를 잃은 녀석은 자꾸만 후배와 나를 찾았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둘 뿐이라는 생각이 녀석에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온종일 집에서만 있는 건 녀석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메시지로는 녀석의 이야기를 듣는 데 한계가 있어 녀석을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 평일 오후 세 시, 일이 없는 세 남자가 모이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시간이었다.


모두가 집을 원했고, 아늑하기를 바랐다. 어쩐지 누군가 내 삶에 대한 책임을 나눠 갖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부모님에게 얹혀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장성함은 성숙의 척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집안에서 일어나는 간섭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감내할 수 있었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 삶의 방식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결국 서른을 코앞에 둘 무렵 독립을 생각해야 했다. 모두가 그러니 나도 그래야겠다는 모호한 이유가 나를 독립으로 이끌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몇 만 원씩 청약을 부었고, 떠밀리듯 집이 생겼다.


지하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데도 녀석은 집을 찾지 못했다. 역에서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는데도 도착하지를 않는 녀석을 결국 후배가 잡아왔다.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 있었다고 했다.

집에 들어선 녀석은 우스꽝스러운 차림이었다. 어깨가 한참 남는 상아색 코트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보이게 했고, 커다란 키높이 구두는 녀석의 가느다란 몸을 더 앙상하게 보이게 했다. 녀석은 코트를 받아주려는 내 손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뻗은 손을 붙잡았다. 우리는 어색한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저는 서, 서울에서 정착하는 게 모, 목표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무엇이냐는 진부한 물음에 녀석이 답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서울의 삶은 내가 가진 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서울 근교에 집을 구한 나로서는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모아둔 돈은 얼마나 되는데?


몇 번의 추궁으로 녀석이 가진 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녀석은 헐떡이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곧 있으면 휴대폰이 끊어질 거라고 했다.


돈도 없이 서울에서 어떻게 살아? 너 월세는 어떻게 내고 있어?


아, 혀, 형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지, 집도 내어주셨거든요.


월세를 어떻게 내고 있냐는 물음에 녀석은 '형'을 만나 서울에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고, 고향에서 하, 한 달 동안 일했는데 이, 이백만 원이 생겼어요. 거, 거기서 혀, 형을 만났어요. 제, 제가 서, 서울에서 사, 살 수 있게 도, 도와주셨지요. 시, 시간을 내, 내어서요. 혀, 형은 조, 좋은 사람이에요. 미, 미술을 하고 이, 있는데 그, 그림이 파, 팔리면 도, 돈이 마, 많이 새, 생길 거래요.


녀석은 스물일곱, '형'은 스물아홉이라고 했다. 미술을 한다는 '형'은 아직 유명한 화가는 아닌 듯했다. 그림 팔리기 전까지는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연명해야 하는 걸 텐데, 여기저기 돈 되는 일이라면 앞뒤 생각 없이 달려들어야만 하는 청춘의 서러움이 전해졌다.


그래, 그 '형'은 돈 많이 벌라고 하고, 너는 어떻게 살 건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를 대하는 것처럼 녀석은 골똘했다. 그러나 곧 복잡한 생각에 버거워 하기 시작했다. 안경 너머 커다란 눈이 답을 갈구했다.


그래도 네가 이백은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보증금 오백에 월세 삼십이면 옥탑방이라도 구할 수는 있거든. 한 달 내내 일하면 백만 원쯤은 생기잖아. 그러면 생활비 쓰고 사, 오십은 남을 거 아니야. 돈 허튼 데 쓰지 말고 모으면 금방 보증금은 만들 수 있을 거야.


워, 월세가 사, 삼십이에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싼 집은 그러기도 해. 너 지금 사는 데는 월세가 얼마나 되는데?


오, 오십만 원이요.


상경을 도와주겠다던 사람이 기껏해야 단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만드는 녀석에게 오십만 원짜리 월세방을 구해줬다니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의아스럽다는 내 태도에서 녀석은 위험을 감지한 듯했다. 또다시 눈동자의 초점이 풀어졌다.


보증금은 네가 낸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비싼 집으로 했어?


저, 저는 보, 보증금 아, 안 냈어요. 혀, 형이 사, 살던 집에서 사, 살게 해, 해 주셨거든요. 그, 그래서 고, 고마워서 이, 이백만 원을 비, 빌려줬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고마워서 이백을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백만 원은 왜 빌린 거라는데?


워, 월세를 밀려서 보, 보증금에서 까, 까이고 이, 있다고 해서요. 그, 근데 거, 걱정 마세요. 그, 그림만 파, 팔리면 바, 바로 주, 준다고 했어요.


상경을 빌미로 그 사람, 아니 그 인간은 녀석에게 접근했고, 마음을 산 뒤 돈을 가로챘다고 밖에는 볼 수 없었다. 흑심 가득한 선심이 심해에 사는 녀석에게는 천해에 오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녀석의 분별력은 놀라울 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나 있었다.


서울에서 머무는 두 달 동안 녀석은 필사적이었지만 월세 말고는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녀석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업체에서는 녀석을 다시 고용하지 않았으니 여유자금이라고는 가져본 적도 없을 것이다. 차라리 굶는 것으로 그 집에서 버텨왔던 녀석은 점점 야위어갔다. 서울 물가가 무섭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녀석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녀석에게 컵라면은 얼마나 절실했던 걸까.


양아치 새끼!


화를 참지 못한 후배의 짧은 외침이 방 안에서 맴돌았다. 놀란 녀석이 울기 시작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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