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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치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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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고 Jul 24. 2024

수치의 생 2 - 심해어 2

사고의 침잠, 녀석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 아래 깊은 곳에서만이 꿈틀대는 녀석의 생각은 위로 오를 기미가 없었다. 녀석은 빛 한 점 없이 캄캄한 심해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헤엄을 치다가 별안간 빛이 드는 곳에 찾아와 자신과 다른 물고기들의 삶을 흉내 내고 있었다.


녀석이 우리의 온정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녀석에게 따뜻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무엇이 맞는지 무엇이 틀린지 녀석은 알지 못했다. 후배가 화를 내는 이유 역시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시작됐을 거라는 막연한 느낌으로 초조해했다.


후배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여자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까지 고개만 처박고 있을 것 같았던 녀석은 여자 이야기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밝아졌다.


드, 등산 모임에 가, 갔었어요. 거, 거기서 마, 마음에 드는 여, 여자를 마, 만났어요. 제, 제가 대, 대시를 했는데 자, 잘 안 됐어요.


눈에 눈물이 그득한 채로 녀석은 신이 났다. 평일에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주말이 되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모임을 찾았다고 했다. 등산 모임뿐만 아니라 영화 평론, 영어 토익 등 꽤 많은 곳을 두드렸다고 했다.


어떤 여자길래 대시까지 한 거야? 느낌이 막 왔어?


후배가 짓궂게 몰아붙이자 녀석이 민망해하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얼른 숨겼다.


제, 제가 카, 카카오톡으로 고, 고백했거든요. 허허허허.


연애 상담을 해주겠다는 후배의 말에 녀석이 솔깃했는지 감추려던 휴대폰을 도로 꺼냈다. 어떻게 고백했는지 알아야지 거절의 이유도 알 수 있는 거라며 후배가 으름장을 놓자 녀석이 눈이 번뜩였다. 카카오톡 대화 목록에는 여자 이름으로 가득했다. 녀석은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우리에게 보여줬다.


너무 예쁘세요.

왜 모임에 나오지 않으셨어요?

이제 모임에 안 오시는 건가요?


영양가 없는 질문과 영혼 없는 대답이 오갔다. 일방적인 녀석에게 여자는 차가웠다. 녀석이 건넨 휴대폰을 손에 쥔 후배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른 대화창을 열었다.


생일 축하해요. 케이크 맛있게 드세요.

커피를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커피 맛있게 드세요.

치킨 드시고 싶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치킨 맛있게 드세요.


대화 목록에 있는 모든 여자들에게 녀석은 말을 걸었다. 그 누구도 녀석에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녀석은 모든 여자들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고 있었다.


뭐야? 기프티콘은 왜 보냈어?


여, 여자들은 도, 돈 많은 남자를 조, 좋아하잖아요. 저, 저는 도, 돈이 없지만 그, 그래도 여, 여자 친구를 마, 만들려면 투, 투자를 해야지요.


남은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려던 녀석이 컵라면의 수십 배는 되는 돈을 고작 화면 속 대화를 이어가는 데 쓰고 있었다. 녀석의 이성관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왜곡되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삶의 고단함은 사랑을 얻기 위해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는 것처럼 태연해 보였다.


이런다고 여자 친구 생기는 거 아니야.


그, 그러면 어, 어떻게 해, 해야 새, 생기는데요?


너 이딴 식으로 살면 여자는커녕 서울에서도 못 버텨. 정신 차려야 돼. 앞으로 이상한 데 돈 쓰지 마. 여자 친구는 서울 적응 끝난 다음에 만들어도 늦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 우선 하나씩 해결하자. 일단은 너 그 집에서 나오는 게 먼저야. 돈도 없으면서 어떻게 버티려고 하는 거야. 당장 이번 달 월세는 어떻게 하려고. 분명 걔한테 책 잡혀서 이상한 소리나 들을 거야. 네 상황 몰랐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이대로는 안 돼. 지금 집에서 나오는 거야. 알겠지?


고개를 주억거리는 녀석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어둡고 피폐한 삶이 보이는 듯했다. 그 집에서 나온다고 해서 녀석이 그 인간에게서 벗어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로 사람을 종속시키고 이득을 취할 정도의 인간이라면 그 인성은 알 만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녀석의 삶에 관여해야 하는 걸까.


이백만 원도 받아내야지.


혀, 형님들에게 그, 그 자식이 나쁜 짓을 하, 할 거예요. 혀, 형님들은 조, 좋은 사람이잖아요.


나쁜 짓이 뭔데?


녀석은 방금까지 '형'이라고 부르던 사람을 그 자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쁜 짓은 분명 우리를 향해 있는 것은 아닐 터, 본인이 겪었던 일들이 떠올라 공포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녀석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했다.


그, 그 자식은 제가 보, 보일러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버, 벌벌 떨고 있을 때 여자랑 세, 섹스하고 다녔어요. 제, 제 돈은 가, 갚지도 않고 여, 여자랑 세, 섹스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그, 그 자식이 저, 저한테 자랑했어요. 저, 저한테 패, 패배자라고 해, 했어요. 제, 제 돈으로 여, 여자랑 세, 섹스했어요. 맨날 여, 여자가 바, 바뀌어요. 바, 바뀔 때마다 저, 저한테 자, 자랑했어요. 여, 여자랑 지, 집에 오, 오면 저, 저더러 나, 나가라고 해, 했어요. 저, 저를 쪼, 쫓아내고 여, 여자랑 세, 섹스했어요. 


녀석이 보낸 서울의 두 달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부푼 꿈을 안고 이곳에 와서는 녀석은 밤마다 외로워하며 신세를 한탄하고 누군가를 저주하는 데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한 녀석은 그 인간을 고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애인과 저녁 약속이 있었던 후배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밤이라도 새울 기세였다. 그쯤에서 우리는 모임을 파하기로 했다. 정부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취업 관련 지원 사업 몇 개를 소개해 주기로 하고 우리는 다음을 기약했다.


녀석은 고마운 마음이 들었는지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감사 메시지와 함께 기프티콘 하나를 보내왔다. 삼만 원 상당의 피자 기프티콘이었다. 이럴 돈 있으면 밥이나 사 먹으라고 핀잔을 줬더니 그 인간이 준 거라고 했다. 돈 빌려놓고 녀석을 안심시키려는 수작인 듯했다. 궁핍한 녀석에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것이기에 사양했지만 제발 받아달라고 사정하는 통에 일단 받아두기로 했다.


우리는 일단 후배를 녀석의 친척 형인 척하기로 했다. 녀석의 어려운 상황을 알아챈 친척 형이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기로 한 것으로 상황을 꾸미고 그 인간을 압박하기로 했다. 혹시라도 녀석이 해코지를 당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제주도에 일거리가 생겨 서울을 떠난 상태라고 했다.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해냈다.


혀, 형님, 그 자식이 도, 돈 주기로 했어요. 그, 근데요, 집은 이, 이제 나가야 하, 한대요.


녀석이 신이 나서 전화를 했다. 나쁜 짓을 할 거라던 그 인간은 거짓말로 꾸며낸 친척 형에게 꼬리를 내린 듯했다. 이제 녀석의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했는데, 보증금이 필요 없는 고시원을 알아보자고 했더니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고시원 환경이 별로여서 그러는 거야?


네, 어, 엄마가 스, 슬퍼할 거예요.


효자 났네, 아주.


고, 고시원에 사, 살면 미, 미친 사람이 되, 될 거래요. 차, 창문도 어, 없는 곳에서 외, 외롭게 주, 죽음을 마, 맞이하겠지요.


죽긴 누가 죽어! 뭔 소리를 듣고 이상한 말을 하는 거야, 대체. 거기서 살면서 준비 잘해서 성공하는 사람도 많아.


어, 엄마가 그, 그랬어요.


아이고,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해. 다른 방법이 없잖아. 옛날 같지 않아서 요즘 고시원 시설 좋은 데 많아. 설득해 보자. 솔직히 네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야? 너는 어떤데?


모, 모르겠어요.


그러면 지금 상황에서 부모님께 손 벌리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 그런데 아, 아버지는 저, 저를 믿지 않으세요. 저, 저한테 쓰, 쓰레기라고 했어요. 뭐, 뭐 해 먹고 사, 살지 아, 앞이 카, 캄캄하다면서요. 저, 절대 도, 도와주지 아, 않으실 거예요.


이래도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녀석에게선 도무지 의지가 보이질 않았다. 연배를 따져보니 녀석 아버지는 군부 정권일 때 공무원이 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한 듯했다. 녀석 말로만으로 그려지는 이미지는 고지식하고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녀석은 단 한 번도 자식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화 통화로는 녀석을 설득할 수 없을 듯싶었다. 문득 무력감이 찾아왔다.


며칠이 지나도록 결론은 나지 않았다. 녀석은 조언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후배는 계속해서 나와 녀석 사이를 오가며 말을 옮겼다. 후배의 말 안에서 녀석은 언제나 불쌍했고 안타까웠다. 하루에도 몇 번씩 녀석 이야기에 우울해졌다.


형, 이 새끼 완전 미친놈이었어. 얘한테 이백만 원만 빌린 게 아니야. 이십만 원, 삼십만 원씩 계속 뜯어가고 있었어. 그림만 팔리면 바로 준다는 개소리 하면서. 대충 계산해도 삼, 사백은 되는 거 같아.


대화가 잦아질수록 녀석이 감췄던 것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녀석의 불쌍함은 매번 갱신되었고 언제나 최고점에 닿았다. 서울은 녀석에게 고통 말고는 준 것이 없었다. 전화기를 붙들고 '시발'을 연발하던 순간과 도마 위에 물고기처럼 의욕 없는 녀석의 눈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새끼 한발 물러난 게 아니었어. 얘한테 전화해서 죽이겠다고 협박했나 봐. 얘 지금 겁먹어서 난리도 아니야.


심해에 머물렀어야 할 녀석이 천해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녀석의 남다름은 언제나 공격받을 이유가 되었고, 심해의 분별력으로는 위기에 대처할 수 없었다.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녀석을 이용해 무료함을 버텨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타인의 삶에 침범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것을 여흥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았다. 녀석도 그랬고, 후배도 그랬고, 모두 각자의 삶에서 치열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녀석의 삶을 침범했나, 녀석의 삶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삶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면서 고작 몇 마디 말로 녀석의 삶을 좌우하려 했던 것이었다.


며칠 사이 녀석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야윈 얼굴이 슬픈 눈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문득 피자 기프티콘이 생각났다. 일단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후배에게 기프티콘을 넘겨주고는 녀석을 살폈다. 


너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


아, 안 돼요. 무, 무서워요. 그, 그리고 치, 친형이 아, 알면 아, 안 돼요.


친형? 또 왜?


그, 그 새끼는 지, 진짜 미, 미친 새끼예요, 아, 아니, 아, 악마예요. 맨날 주, 죽고 싶다면서 나, 나한테 같이 주, 죽자고 했어요. 어, 엄마 아빠한테 말하면 주, 죽어버리겠다고 했어요. 매, 맨날 저, 저한테만 마, 말해요. 그, 그 새끼랑 대, 대화하면 수, 숨이 마, 막힐 거 가, 같아요.


녀석은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휴대폰을 꺼내 친형과 나눈 대화를 보였다.


서울도 지옥이야. 여기랑 다를 거 없어. 그냥 죽자, 시발.

엄마 년은 멍청해서 또 아빠 새끼한테 굽신굽신거린다. 지랄 같은 집구석.

혼자 지옥에서 벗어나니까 좋냐? 이 지옥에서 나 혼자 죽어야 돌아오겠냐?

쓰레기 같은 새끼들 또 면접만 보고 쌩까네. 부르지나 말지, 시발.


심해를 떠난 녀석은 평생을 함께 했던 다른 심해어에 의해 여전히 심해에 머물러 있었다. 상경은 다른 심해어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인지도 몰랐다. 다른 심해어는 녀석에게 동질감을 강요했고, 녀석은 고통스러워했던 모양이었다. 애초에 녀석에겐 삶의 목적이라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피자를 시키기 위해 화면만 쳐다보던 후배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다가 대신 메시지를 보내왔다. 


형, 이거 기프티콘 이미 사용한 거래.


후배와 나는 참담함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후배는 피자는 자기가 살 테니 녀석에게 신경 쓰라고 했다. 그 인간은 돈이 없어 쩔쩔매는 녀석을 안심시키려 이미 사용한 기프티콘을 줘서 입을 막은 것 같았다. 후배는 녀석에게는 비밀로 하자고 했다. 그 편이 좋을 듯싶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건 내가 도와줄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주면 되잖아. 그대로만 말해.


녀석을 그냥 둔 채로 휴대폰으로 몇 마디를 적었다. 지금 지내는 곳에서 더 이상 지낼 수 없게 됐다는 것, 현재 벌이로는 보증금을 만들 수 없으니 고시원에서 지낼 수도 있다는 것, 당장 돈이 부족해 한두 달 치만 방세를 빌릴 수 있겠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이렇게 마, 말하면 되, 될까요?


녀석은 휴대폰을 들고 여전히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가 무서우면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그제야 녀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녀석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었다. 휴대폰을 한참 더듬거리던 녀석은 '엄마'라고 적힌 화면 앞에서 잠시 멈췄다. 흔들리는 동공이 녀석의 불안감을 대변했다. 후배가 답답했는지 녀석에게서 휴대폰을 뺏어 들어 통화 버튼을 대신 눌러 손에 쥐여주었다.


어, 엄마. 그, 그 형이 해, 해줬던 집. 그, 그거 이제 거, 거기서는 사, 살 수 없어. 계, 계약이 끝나서 고, 고시원에서 사, 살려고.


할 말은 아직 남았는데 녀석은 더 말이 없었다. 녀석 귀에 스피커 사이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녀석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만 끄덕였고, 이따금 힘없는 대답만 했다.


어머니가 뭐라고 하셔?


녀석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계좌로 육백만 원이 입금되었다는 메시지였다. 자식을 향한 어미의 직감이었을까. 녀석의 어머니는 버벅거리며 할 말도 다 못 하는 아들의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는 고민도 없이 송금을 했다. 이미 이런 상황쯤은 예상했던 것처럼 어머니의 결단은 신속하고 예리했다. 분명 오랜 시간 축적되어 나타난 결과였으리라. 아들의 연락만 기다렸을 부모의 심정이 돈 육백만 원에 담겨있었다.


이 집은 어떠냐, 저 집은 어떠냐 메시지로 사진을 찍어 보내던 녀석은 사흘 만에 집을 구했다고 했다. 귀찮을 정도로 의견을 구하더니 결정은 제멋대로 해버렸다. 이럴 거였으면 뭐 하러 물어봤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부모님이 인터넷에서 알아봐 준 집이라고 했다.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상경한 녀석의 이사는 간단했다.


새 집에 들어선 녀석은 매일 밤 외롭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며칠 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단기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여자가 자신을 벌레 취급했다는 이야기와 돈이 없어서 저녁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카페에 가고 싶지만 함께 갈 사람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후배와 나는 주말에 시간을 내기로 했다. 취업 지원 사업에 대해서도 알려주기로 했고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 주말에 집들이를 계획했다.


녀석이 사는 곳은 대학가 주변 옥탑방이라고 했다. 거리는 초겨울 쌀쌀한 날씨가 무색하게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삼삼오오 모인 청춘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꽃이 피어났다. 연인들은 날씨를 핑계 삼아 부벼댔고, 카페 가득 들어선 사람들은 대화에 몰두했다. 녀석은 활기 가득한 청춘들 틈에서 외로움이 증폭됐는지도 몰랐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헐레벌떡 뛰어오는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에 지난번에 봤던 상아색 코트를 입은 채였다. 숨이 차오르는지 녀석은 허리를 숙인 채 한참 동안 헐떡거렸다. 머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머리칼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아슬아슬했다.


머리는 말리고 나오지 그랬어.


아, 혀, 형님들 빠, 빨리 만나러 오려고 머, 머리에 무, 물 묻히고 나왔어요. 머, 머리가 부, 부스스했거든요.


안경은 또 왜 그래?


제, 제가 바, 밟았어요. 아, 안경이 바, 바닥에 이, 있는지 모, 몰랐어요.


부러진 안경다리는 반창고에 의지한 채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정이 잘 되지 않는지 자꾸만 안경이 흘러내렸다.


가자, 어디로 가야 해?


저, 저만 따, 따라오세요.


녀석 만이 위치를 알고 있는 집에 녀석의 인도로 찾아가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한참이나 앞서서 걸어가는 녀석은 이따금 우리가 잘 따라오는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같이 가, 왜 그렇게 앞에서 가.


아, 아니에요. 제, 제가 머, 먼저 길을 사, 살펴야 해요. 혀, 형님들을 보, 보호해야 하니까요.


무슨 보호야. 그냥 같이 가자. 안내견도 아니고 그냥 말로 해도 잘 따라가니까 같이 가.


그, 그런데요, 혀, 형님들. 제, 제가 마, 말씀을 아, 안 드린 게 이, 있어요. 오, 오늘 어, 엄마랑 아, 아버지가 오신다고 해, 했거든요. 그, 그런데 제, 제, 제가 빨리 가, 가라고 했어요. 자, 잠깐만 드, 들르신다고 하, 하니까 거, 걱정 마세요.


부모님이 오늘 오신다고? 우리 오는 거는 알고 계셔?


아, 아니요. 모, 몰라요. 아, 오, 오지 말라니까 계, 계속 오, 온다는 거예요. 지, 진짜 귀, 귀찮게.


아니, 그것보다 부모님이 언제 오신다고 했는데? 너 걱정돼서 보러 오신다는 거 아니야?


이, 이사해, 했던 날부터 계, 계속이요. 지, 진짜 귀찮아요.


미친놈아. 부모님이 먼저고, 우리는 나중이지. 왜 같은 날 집들이를 잡아?


혀, 형님들이 시, 시간을 내, 내주신 거니까요.


시간은 우리만 낸 거야? 부모님도 시간 내서 오시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부모님께 전화드려서 언제 오시는지 여쭤봐. 상황 봐서 우리는 먼저 가면 되니까.


풀이 죽은 녀석이 저만치 떨어져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녀석은 또 전화기를 붙잡고 허공에 머리를 조아렸다.


어, 엄마가 혀, 형님들 하고 가, 같이 시, 식사하고 시, 싶으시다는데요.


어쩐지 녀석은 부모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못 견뎌하는 것 같았다. 그건 양쪽에다 다른 내용의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됐다. 하지만 그건 녀석 부모님을 뵈어야겠다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녀석의 말은 언제나 본질이 없이 허공을 떠다녔다. 가까스로 뽑아낸 정보들도 녀석 입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이리저리 흩어진 말들을 주워다가 이어 붙여 녀석에게 확인해 본 것뿐이었다.


녀석의 이상 행동이 선천적인지, 가정환경에서 비롯된 건지도 궁금했다. 녀석을 쓰레기 취급했다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싶었다. 혹시라도 녀석의 정서적 불안 상태가 가정환경에서부터 비롯한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치료를 받게 해야지. 후배도 나도 이후 일정은 특별히 잡아놓은 게 없어서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주소만 주고 직접 찾아오라고 했었다면 한참 헤맸을 만한 길이었다. 전화를 끊고 다시 앞서가기 시작한 녀석이 저만치 앞에서 멈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다세대 주택은 넉넉잡아도 삼십 년은 된 듯했다. 철살로 만들어진 대문을 밀자 덜컹 큰 소리를 냈다. 눈에 보이는 계단이 옥상으로 이어지지 않아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녀석이 익숙하게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건물 외벽으로 오르는 철계단이 있었다. 녀석처럼 앙상한 철계단이 옥탑 위로 오르는 유일한 방법인 듯했다. 철계단은 남자 셋을 받아내는 게 버거운지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옥탑방 현관은 성인 남자 하나 들어가기도 버거웠다. 덩치 큰 후배가 몸을 구겨가며 문안으로 들어왔다. 방안은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다. 창문을 찾으려는 후배가 방 안에서 갈 길을 잃었다. 방 안에 창문이라고는 싱크대 쪽에 나 있는 것이 유일했는데 그나마도 너무 작았다. 화장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구석에 달린 환풍기는 망가진 지 오래인 듯했다. 아쉬운 대로 현관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온 집안에 겨울 냉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보일러는 없는 듯했다. 벽에 붙은 스위치는 방바닥에 흐르는 전기 열선을 조작하는 것이었다. 아쉬운 대로 열선을 켜서 바닥에 불을 넣었다.

작은 방에는 이사 왔을 때부터 있었다던 옷걸이와 집에서 주문해 택배로 보내줬다는 접이식 간이침대만 있었다. 간이침대 옆에는 녀석의 전부인 캐리어가 입을 열고 있었다. 작은 방에서 황량감이 쏟아지는 듯했다.


부모님 오신다며, 그 꼴로 있을 거야?


왜, 왜요?


씻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너 이러고 사는 모습 보면 부모님 뭐라고 하시겠어. 가서 얼른 씻고 나와.


녀석을 반강제로 화장실에 밀어 넣고 우리 둘은 말을 잃었다. 따로 말이 없어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바닥은 금세 뜨겁게 끓어올랐고, 열어둔 문으로는 냉기가 스며들었다. 냉기와 온기를 동시에 느끼면서 녀석의 서울 살이를 떠올렸다. 발바닥에 닿는 온기로 추운 겨울을 버텨내야 하는 아슬아슬한 녀석의 삶이 이 집에 녹아있었다.


얼마 뒤 화장실 문이 열리고 녀석은 알몸으로 나왔다. 거무튀튀한 부자지가 앙상한 녀석의 몸뚱어리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흠뻑 젖은 몸이 온 바닥에 물기를 떨어뜨렸다.


아, 시발! 옷 입고 나와. 왜 벗고 나오고 지랄이야!


후배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치자,


오, 옷을 아, 안 들고 갔으니까요. 오, 옷이 여, 여기 있어요. 소, 속옷은 어, 없어요. 어, 어제 빠, 빨았는데 아, 아직 아, 안 말랐어요.


녀석은 알몸으로 캐리어 앞에 쭈그려 앉더니 옷을 꺼내 입었다. 젖은 몸에 달라붙은 티셔츠가 녀석의 앙상한 몸을 드러냈다. 녀석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태연했다.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열어두었던 현관을 다시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방에 남아있던 잔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혀, 형님들 어, 어떻게 하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 새끼한테 연락 왔어?


아, 아니요. 그, 그런데 이, 이 분은 조, 좋은 분이에요. 도, 동경대, 교, 교수님이에요. 제, 제가 이, 일본에 유학 갔을 때, 도, 도움을 주, 주신 분이에요.


일본 갔다 왔었어?


그, 그게...


뭘 또 거짓말을 하려고 해. 네가 무슨 유학이야? 학교도 겨우 졸업했다며. 교환 학생으로 다녀왔다는 거야?


아, 네.


어디 학교로 갔다 왔는데?


도, 동경대요. 거, 거기서 아, 알게 된 분이에요.


동경대를 갔다 왔다고? 일본인이야? 아니 너 일본어 할 줄 알아?


아, 아니요. 이, 일본어는 모, 못해요. 이, 이분은 도, 동경대 고, 골프학과 교, 교수님이세요.


일본인이냐고.


아, 아니요. 하, 한국 사람이요.


동경대 한국인 교수면 엄청 유명한 사람일 텐데. 너 도와주고 있다는 거야?


혀, 형님. 비, 비밀로 해 주세요. 교, 교수님이 나, 난처해질 거예요. 교, 교수님이 지, 지금 어, 어려운 상황이라서 하, 한국에 있으면 아, 안 되신댔어요.


동경대 교수가 왜 연락을 했는데?


교, 교수님은 저, 정말 조, 좋은 사람이에요. 그, 그 자식 하고는 다, 달라요. 외, 외로워하는 저, 저를 위해 라면을 사, 사 오셨어요. 그리고 제, 제가 외롭지 않게 여, 여기서 주, 주무시고 가, 가셨어요.


그래서 왜 연락을 했냐고.


교, 교수님이 오, 오늘도 오, 오시겠대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거짓말인지, 아니, 진실은 말한 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동경대 교수가 녀석을 돕겠다는 이유로 라면을 선물로 가져오고,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하룻밤 같이 자고 갔다니.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건 비밀로 해달라는 점이었다. 한국에 있으면 난처해지는 교수는 어떤 사람인가. 무엇보다 동경대 골프학교 교수라는 타이틀부터 너무 사기꾼적이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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