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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전자 Nov 05. 2022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서 알게 된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 유튜브 제목은 행복은 '열심히'에 있지 않다는 설명이었는데 그것마저 눈길을 끌었다. 평소라면 유튜브 요약이나 리뷰를 보겠지만 적나라하게 우울증이란 단어를 영화 제목에 넣었다는 것 (가끔은 이런 당돌한 불편함이 꽤 좋을 때도 있다)과 쌀쌀한 날씨 배경의 일본 영화라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영화를 직접 보게 되었다.


영화는 아내 하루코 입장에서 우울증 판정을 받은 남편 츠레/미키오를 바라본다. 보는 내내 우울증을 겪는 사람의 모든 걸 정말 잘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충류가 되고 싶은 츠레, 하루코가 옆에 있어도 격렬히 외로워하는 츠레, 몸이 아파도 회사에 꼭 출근해야 한다는 츠레, 하루코의 만화가 인기 없는 이유가 (하루코의 만화는 츠레와 전혀 관련이 없지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츠레, 하루코에게 도움은 되지 못할 망정 방해가 되는 것 같은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운 츠레. 쌀쌀한 가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배경과 회사에 가기 위해 사람들에 끼여 지옥철을 타고 출근하는 모습까지 그 심정을 잘 담은 영화이다.


그리고 츠레 곁에는 하루코가 있다. 츠레가 낫기를 누구보다 원하지만 애쓰지 않고 옆에서 가만히 지켜봐 주는 하루코. 츠레가 엉엉 소리 내며 자기혐오스러운 말을 하면서 울어도 하루코는 가만히 옆에 앉아 지켜봐 준다. 분명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냥 곁을 지켜준다. 난 언제나 여기에 있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츠레 라고 하면서 옆에 앉아 응원한다. 그렇게 일정한 거리에서 머무는 하루코는 애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켜낸다.


신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말이 있다. 하루코와 츠레 사이의 공백에는 신이 존재한다. 하루코가 츠레의 우울증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걸 알았을 때 고개 숙이며 전한 스미마셍, 츠레가 거북이처럼 이불속에서 엉엉 울 때 그런 츠레를 이불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하루코, 하루코가 회사에서 어떻게 일을 구했는지 얘기를 전해 들을 때 (하루코는 만화 편집자한테 남편이 우울증에 걸려서 자신이 일을 해야 하니 제발 일을 달라고 청한다) 미안해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대신 가볍게 웃어넘기는 츠레. 둘 사이의 거리 덕분에 이들은 더 초라해지거나 비참해지지 않았다.


사람 사이가 너무 가까우면 버거워진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에 대한 연민이나 과한 친절함 내가 해결해줄게 식의 행동은 불편함을 낳는다. 그리고 불편함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애쓰지 않아서 생기는 약간은 공백은 사람 간 숨 쉴 틈을 준다. 비슷하게 만약 하루코가 애썼다면 츠레와 하루코는 더 힘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하지 않은 친절은 언제나 도움이 되니 오해 금물!)


요즘도 나의 기분은 오락가락한다. 어떤 날은 차가운 바람에 눈물이 나는데 그럴 때마다 계속해서 돌아와 빠지는 것 같다. 첨벙첨벙. 그러다가 무알콜 맥주 한 캔을 들이켜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영화 속 츠레는 어느 날 아침 공기가 좋다면서 창문을 열어재낀다. 그리곤 함박웃음을 보인다. 그러나 갈대 같은 기분은 또다시 가라앉고 그날 저녁 일기에서 츠레는 우울하다고 적는다.


우울증에 걸리면 기억력, 집중력, 판단력이 저하되는 인지기능 장애가 나타난다. 가령 회사에서 상사가 불합리한 요구를 하거나 기분이 나쁜 말을 하는데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맞장구치거나 그들이 시키는 일을 나를 상하게 하면서도 계속하는 것이다. 인터넷 서비스 콜센터 직원인 츠레는 무례한 고객과 상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마른 미소를 보일 뿐이다.


마음의 감기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다. 특히 현대의 도시 사회를 살아가는 당신이라면 말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츠레는 우울증을 겪고 있는 환자로서 강연 무대에 서는데 (하루코가 우울증 환자와 그의 가족이 겪는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 익숙한 목소리의 남성이 그에게 질문을 한다.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하면서. 츠레는 그 낯익은 목소리가 콜센터 직원으로 일할 때 자신을 괴롭히던 고객의 목소리였음을 알아챈다. 다시 나타난 고객은 책을 써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츠레와 따뜻한 눈빛을 나눈다. 고객의 반복된 까탈스러움과 무례한 전화는 그 역시 혼자 고군분투하면서 느낀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우울증은 알아차리기 어려운 병이다. 어쩌면 당신도 모르게 겪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주변의 누군가가 겪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도 경고도 없이 닥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내일도 내년도 십 년후도 아닌 오늘 이 순간뿐이다.


오늘은 눈을 떴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가고 싶은 카페가 생각났다. 갈까 말까 수백 번 고민한 끝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왔다. 아무래도 집에만 있으면 답답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숨 쉬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죽고 싶다는 생각은 선택지에서 사라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 알지 못한다. 따뜻한 햇살을 받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으면 청승맞게 눈물이 흘렀다. 가스라이팅하는 상사 때문이었을까 아님 그전부터 시작된 것이었을까? 혹은 부모의 과대보호로부터 반대편에 선 자유와 독립성이라는 존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울증 대부분의 원인이 상실이라는데 나도 그런 것이라면 나는 무엇을 상실한 것일까?


그런데 원인을 찾거나 분석하는게 의미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저 내년의 나는 조금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할 뿐. 나도 가끔은 츠레처럼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니까 말이다.


오늘 밤에는 침대 위에서 편하게 <츠레가 우울증에 걸려서>를 보면서 잔잔한 공감과 위로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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