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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전자 Aug 19. 2023

삶으로부터 버림받은 백고래

<더 웨일>

  더 웨일. 미국에서 초고도비만인 사람들을 낮잡아 이르는 단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찰리는 272kg '웨일'이다.


  나는 찰리가 왜 뚱뚱해졌는지 궁금하지 않다. 원래부터 그렇게 뚱뚱한 사람이었냐는 엘리의 질문에 찰리는 가까운 사람이 떠나가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남자친구 앨런의 죽음으로 찰리는 우울증과 식이 장애를 앓았다. 폭식증과 식이 장애는 그에게 고혈압과 심근경색, (영화 타임라인 상으로) 일주일 간의 삶을 남겼다.


  그가 왜 진실만 추구하게 되었는지가 나는 궁금하다. 찰리는 그의 에세이 수업에서 학생들이 진실된 내용을 쓸 것을 강조한다. 다른 강사들처럼 다시 쓰라는 말만 반복하지 않는다. 단 한 줄이라도 진짜 자기 이야기를 할 것을 강조한다. 그에게 진실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왜 그토록 진실에 집착하며, 엘리가 노트에 갈겨 놓은 철저히 감정적인 문장들에 환호하는 걸까?


  찰리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것이라고 생각한 게 있다면 그건 앨런과의 사랑, 그리고 딸을 향한 사랑이다. 이 두 가지가 무조건적으로 진실하다는 맹목적인 믿음이 그를 지배한다. 그에게는 삶의 동력이었을 테지만 그 잘못된 허상이 현재의 찰리를 만든다.


  두 관계는 찰리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누군가의 애인으로서 아버지로서 이해받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 삶의 이유. 그는 두 관계에서 모두 실패하며 삶에서 진실을 잃는다. 그리고 더욱 진실에 집착한다.


  게이인 찰리는 앨런을 만나면서 진짜 자신을 찾았다고,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앨런과 함께한 6년은 꿈같았을 것이다. 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조차 잊을 만큼.


  하지만 남자친구는 죽었다. 찰리는 자신의 전부를 잃게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남자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큰 무력감을 느낀다. 진실된 연인 관계에서 그는 실패한다.


  찰리는 남자친구의 죽음 이전 엘리와의 관계에서도 실패했다. 딸을 떠났다는 것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메리에게 돈을 보내는 것 외에는 엘리와 교류할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리와의 관계를 덮어둘 만큼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이었을까?


  찰리에게 딸은 왜 그렇게 큰 의미가 있었을까? 각본가 사무엘 D. 헌터가 (당시에는 없지만 지금은 5살짜리 딸이 있다고 한다.) 자식을 갖고 싶던 심정이 반영되어 자식이 그에게 가져올 의미를 유추하여 담은 것일까? 찰리가 어째서 엘리와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자 했는지는 아직 의문이다.


  찰리의 인생은 실패이다. 딸과의 관계에서도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삶의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잃었다. 진실된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를 부정한다.


  내가 인생에서 잘한 게 단 하나라도 있는지 알아야겠어! 찰리는 (어쩌면 처음부터 허상이었을지도 모르는) 진실을 자꾸만 찾는다.




  이 부분까지 보면, 영화에서 드러난 시기의 찰리는 안타깝다. 참 불쌍하다. 하지만 초점을 그의 삶 전반으로 넓혀보자.


  메리의 말을 빌리자면 애초에 찰리가 메리와 결혼한 이유는 그가 아이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리는 아이가 8살 때 가정을 떠났다. 대학 야간반에서 가르치던 학생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 찰리는 아이와 교류 없이 9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세월 속 아이는 17살이 되었고 남자친구는 6년의 동거 끝 자살했다. (영화에서 메리는 찰리를 향한 애정과 연민을 보이는데 정말 안타깝다.)


  현재 찰리의 상황은 자의로 만들어진 것도 타의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일어난 사건의 결과이다. 현재의 찰리를 만든 것은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럼에도 나는 찰리가 마음속 끝까지 불쌍하다. 그리고 역겨움도 느낀다. 그가 웨일이어서도 게이여서도 아니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역겨움은 찰리가 스스로를 그렇게 비추기 때문이다. 지금의 찰리를 만든 모든 사건으로부터 느낀 역겨움은 그러한 사건에 휩쓸린 찰리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찰리의 집은 자학의 현장이다. 딸과 전부인을 '버린' 죄, 남자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 구원받지 못한 죄로 폭식한다. 그는 한화 약 1.2억이 은행에 예치되어 있음에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엘리를 위해 마련한 목돈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기심이 조금만 자신에게 더 쏠렸더라면. 앨런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컸는지 알고 연인의 죽음에도 살아보고자 했더라면.


  그가 가정을 떠났어도 가족과 소통했더라면. 앨런의 죽음 이후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토록 진실만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의 거짓을 어느 정도 눈 감고 살았더라면. 너무 진심으로 살지 않았더라면. 너무 진심을 내비치지 않았더라면.


  영화 마지막에서 슬퍼서 눈물이 났다기보다 찰리가 가련해서 눈물이 났다. (사운드트랙도 감정이입을 하는 데에 한몫했다.) 공감이 되어서. 전 단락 마지막 문장의 이유로.




  찰리가 죽기 직전까지 읽고 싶어 했던 글은 다름 아닌 딸이 쓴 <모비딕> 에세이였다. (남자 친구의 글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실된 에세이라고 생각했던 글. 엘리의 에세이는 찰리와 엘리의 부녀 관계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 분노하는 엘리와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백고래 찰리. 감정이 없는 고래. 불쌍하고 큰 짐승.


  <더 웨일>은 타인으로부터, 삶으로부터, 스스로에게서 거부당했지만 여전히 이해받고 싶은 사람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이 외에도 종교의 영향과 미국 사회에서 초고도비만인 사람들을 대하는 시선을 담아내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거나 미국에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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