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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Feb 17. 2020

투쟁은 처음이라...(2)

[나와 우리의 투쟁일기_3]

1월 2일과 3일, 양일에 걸친 사측과의 대화 자리에서 얻은 성과란 더 이상 서로 물러설 바가 없다는 결연한 의지의 확인뿐이었다. 왜 하루아침에 우리 중 누군가가 해고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대답할 필요도 이유도 근거도 없다는 것이 사측의 일관된 답변이었고 그 대답엔 어떠한 논리도 가치도 존중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일관된 방향성만이 존재했다.


그 사안, 해고의 사유에 대해 말할 이유가 없다는 것


결국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외부에 알릴 수밖에 없었고 그리 기자회견의 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노조라고는 하나, 고작 스무 명에 남짓한, 생긴 지 겨우 일 년 남짓한, 노조의 이름을 걸고 제대로 싸워본 적 조차 없는 우리였다. 그런 우리가 모여 각자 역할을 나누고 기자회견을 준비하기에 분주했다.

기자회견 때 발표할 성명문과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일, 배포처를 정리하고 리스트를 구축하는 일, 작성된 보도자료와 안내문구를 발송하는 일, 기자회견에 사용할 손피켓과 현수막 문구를 만들고 제작하는 일, 여러 잡다한 일들이 꼬리를 물었고, 정해진 역할 분장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차곡차곡 일을 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1월 6일 아침, 기자회견 당일, 하필 올겨울 내내 따뜻하던 날씨가 갑자기 매서워진 때였다. 도청 앞 로터리에 눈발이 날렸고 칼바람이 볼을 스쳤다. 기자회견이라 하여 대포와도 같은 카메라가 출동할 줄로만 알았건만 그런 전문적인 장비 따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봉고차 옆문에 대문짝만한 로고가 적힌 방송차도 제대로 된 프레스라인도 무시무시한 경계태세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 중 누군가는 티비 속에서나 보아 온 프레스룸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 쪼르륵 앉아하는 회견인 줄 알고는 멀쑥한 정장코트와 구두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 정도로 우리에게 투쟁은 낯설고도 무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선 우리의 마음과 요구만큼은 결코 무디지 않았다. 에둘러 포장하지 않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결의와 그 결의만큼의 태도와 그만큼에 해당하는 삼엄한 마음들이 존재할 뿐이었다.


비록 티비 속에서 보아온 그런 기자회견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목소리에 주목하는 기자들과 카메라와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하였다. 어느새 한 명 한 명으로 채워진 로터리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눈발은 더욱 거세워졌다. 고심하여 정한 문구들로 가득 찬 A3 사이즈의 손피켓을 든 채 어지러이 흩어진 대오를 정리하고 나란하고도 차분히 자리를 채워나갔다. 피켓 속에 적힌 그 문구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요구들이라 이 상황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첫 성명문 발표가 시작되었다. 그 발표문 안에는 수많은 세상의 모순들이 존재하였다. 해고자로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를 위한 목소리가 차디 찬 허공을 맴돌았다. 허공을 맴돌던 목소리가 다시 되돌아 닿는 그 거리만큼의 묘한 공감이 느껴졌다. 이 목소리들이 결코 현실의 법리와 세상의 순리를 벗어나지 않은 당연한 요구이며, 노동자로서의, 나의 노동을 지키는 목소리라 생각되어 그것들에게서 아릿한 안도감과 괴리감이 함께 느껴졌다.


첫 발언에 이어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낭독문 발표가 이어졌다. 비현실과도 같은 이 상황들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온 동료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비록 며칠에 불과한 경과를 발표하는 동료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과 절규가 묻어있었다. 그것은 이미 며칠이 아니라 수억만큼의 시간들과도 같았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우리 모두 쉽게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이 싸움이 결코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 누구도 이 싸움이 쉬운 일일 것이라 생각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외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해야 지금을 또한 버틸 수 있었다.


경과를 담은 낭독에 이어, 우리를 지지하는 연대발언, 일을 통해 마주해온 주민들의 응원 발언 등이 이어졌다. 그 발언들은 결코 세련되지도 유창하지도 수려하지도 않았지만 이 추운 날씨, 이른 아침에 모여 하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발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같이 구호를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민간위탁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선별고용 어림없다 전원고용 보장하라!”


기자회견의 마지막 제창인 만큼 제대로 각을 맞춘 격조 있는 칼구호가 되어야 했건만, 구호는 꼬이기 시작했다. 보통 마지막 네 글자를 두 번 따라 외쳐야 하는 투쟁 구호를 외쳐본 경험 조차 전무하던 투쟁 초짜들에게 구호 제창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를 보던 분이 멈칫 당황하여 말을 더듬으며 상황을 추스렀다.


“우리 동지들이 투쟁이 처음인지라 구호를 외치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외쳐보겠습니다!”


몇 초 전까지 다들 눈물을 머금으며 겨우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는데, 꼬여버린 구호 덕에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이내 목소리를 정렬하고 바람을 가득 담은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보장하라!”

그렇게 우리의 첫 기자회견은 끝이 났다.

과연 얼마만큼의 기사가 나왔을지 계속해서 네이버, 다음, 구글 창을 켜놓고 검색에 검색을 반복했다. 보도자료를 뿌린 곳만 백여 곳에 달했건만 실제 기사가 난 곳은 열 군데 남짓이었다. 사실 우리는 도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겨우 스무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기관에 불과하였다. 수많은 언론사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그만큼 인터넷 가십을 채울 기사들은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흔하고도 흔한 부조리의 현장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사실, 기자회견 하나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을 것을 안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그럼에도 해볼 수 있는 가능한 것들을 해보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그리고 중간을 벗어난 외진 곳에 놓인 우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줄 사람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 낮은 현실에 대한 자각과 공감이 멀찌만치 퍼져 있었고, 결국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라는 필요와 자각은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우리의 첫 기자회견은 어설프고 군데군데 초짜 티로 가득하였지만, 그 마음만큼은 수백 명 수천 명에 달하는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노동의 감수성이 무엇인지 지금 당장 알 수는 없으나, 우리의 현장을 지키고 지켜오고자 노력해 온 중간지원조직 노동자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말하며 같은 길을 갈 수는 없으나, 누군가를 배제하고 혐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그간 말해 온 일터이고 공동체임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 첫 기자회견을 치러냈다는 안식도 한 찰나, 우리는 다시 또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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