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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Feb 27. 2020

피 흘리는 투쟁 전선

[나와 우리의 투쟁일기_6]

2020년의 첫 생리가 시작되었다. 다리가 저려오고 아랫배가 쑤시다 못해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아래로는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데 입에서는 자판기처럼 구호가 술술 흘러나왔다. 피켓을 들고 있다가 허리를 잠시 펴냈다가 피켓 뒤로 잠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이놈의 생리는 왜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이리 정확하게 찾아오는지, 괜시리 30대 성인 여성의 이 건강한 몸뚱아리와 자궁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는 새해의 첫 생리를 이곳에 서서 맞는구나 생각하니 무언가 씁쓸하고도 아릿한 것이 목에 한가득 넘어왔다.   


거리에 서서 같은 구호를 외친지도 열흘이 다 되어갔다.


어떤 이들은 잠깐 멈춰 서 피켓에 담긴 문구를 읽기도, 잠시 귀 기울여 우리의 구호를 듣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냥 열흘째 저 시간, 저 자리에 서있는 붙박이와도 같았다. 더군다나 도청이라는 공간은 “내땅내놔, 내땅내놔” 부터 시작하여 온갖 것을 요구하는 무수한 민원들이 하루를 마다하고 진을 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걸음을 멈추어 우리의 메시지에 주목하는 이들의 잠깐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고맙기까지 하였다.


조를 나누어 청와대 앞에서 피켓시위를 이어가던 동료들은 투쟁 현장에서까지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작고 미약한지 알리는 인증사진들을 보내왔다. 청와대 앞에는 수십 명, 수백 명에 달하는 이들이 매일마다 집회를 이어갔고, 기자회견이 펼쳐졌다. 매일매일 거대한 집회 인력들 사이에 끼어 우리는 사진 상에서도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하였다. 우리는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사업장의 근로자이며, 그중 4명이 해고된 것은 세상의 수없이 많은 부조리 중 매우 작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었다.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는 한정되어 있었고, 아무리 많은 보도자료를 뿌린다 한들 그것에 주목하여 기사화까지 이어가 주는 곳들은 손꼽히리만큼 소수일 뿐이었다.   

 

지금껏 광화문 거리를 메우던, 시청 앞에 서있던 수많은 문구들을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고 외면하며 살아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앞으로 우리는 피켓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잘 읽어주자!'라는 자조 섞인 농담들이 오고 갔다. 우리는 어느덧 세상의 여러 부조리와 그것에 맞서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일하고 온 것보다 더 큰 강도로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내내 서있던 다리와 몸은 둘째치고 마치 큰 바위 하나를 얹고 있는 듯 머리가 지끈거렸다. 티비 속에는 최근 즐겨보던 블랙독이라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보기로까지 챙겨가며 6화까지 정주행을 마친 드라마였다. 그런데 더 이상 드라마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드라마 속 비정규직 교사들의 이야기가 그저 드라마 속 스토리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 역시 우리의 현재와 너무도 맞닿아있어 되려 외면하고픈 마음이 커졌다. 자기 전 몇 장이라도 읽어내려 애쓰던 책을 마주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아껴듣던 음악을 듣는 것 역시 어려워졌다.


드라마 속 이야기에도, 책 속에 담긴 삶에도, 누군가의 사연이 담긴 목소리에도 쉽사리 다가설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하나의 서사가 담긴 스토리와 목소리들을 받아내는 것이 버거웠다. 지금 내 삶이, 일상이 맥락을 잃은 채, 갈피를 잃은 채 빈곤하고도 가난해져 가는데 또 다른 서사와 감정을 소화하는 것이 힘겨웠다. 나의 서사가 모조리 뒤엉킨 상황에서 다른 무엇의 서사와 그 안에 담긴 은유들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것에 다가서는 순간 그것들이 내 복잡한 심연을 갈기갈기 헤집고 그 틈을 뒤덮을까 두려웠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 감정을 다 들켜버린 채 이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아 외면하고 또 외면하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징계, 고용 취소’ 등등 사측의 문자가 매일매일 쌓여갔다. 서로 애써 숨기고는 있었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 지쳐갔고 침묵하는 시간들이 길어졌다. 대부분 가정이 있는 이들인지라 집에서의 채근도 점차 늘어갔다. 심지어 누군가는 매일 아침 출근을 가장한 채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점심시간이면 구호 소리를 피해 조용조용히 통화를 이어나갔다.


매일매일이 돌아갈 길 없는 일방통행의 좁은 골목길과도 같았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지금의 힘듦도, 회사의 문자도 아니었다. 그 정도들은 각기 달랐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흔들림을 모두들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려하던 일이 생겨났다. 거리에서의 투쟁을 시작한 지 약 일주일 만이었다.

아침 선전전을 마친 뒤 함께 하던 동료 한 명이 사라졌다. 회사로 복귀하기 위해 이미 70킬로미터에 달하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긴 차였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도 이르고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동요가 술렁였다. 비난과 책망, 원망, 아쉬움이 뒤섞였다. 해고자가 된 동료를 포함하여 고작 18명에 불과한 우리 가운데 이대로 한 명, 한 명 빠져나간다면 지금껏 이어온 투쟁과 우리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결국 청와대, 도청 등지에 각기 모여있던 우리는 빠르게 이동하여 사무실 인근에 마주했다. 복귀를 결심하고 서둘러 이동한 직원과 마주 앉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우리가 과연 언제까지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과연 이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은 있는걸까


이미 하나둘씩 지쳐가고 있었고, 우리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고해성사와도 같은 고백들이 이어졌다. 결국 먼저 서둘러 출발한 한 명에서 한 명을 더해 두 명이 이 싸움을 더 이상 이어나가기 힘듦을 고백했다. 마음이야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라도 조금 더 함께 해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말린다고, 붙잡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각자의 삶에서 이 문제가 갖는 무게감, 일상에서 버텨내야 할 무게감들이 달랐고 그 경중 또한 제각기였기에, 무엇이 옳다고,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사실상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들, 버텨갈 시간들은 모두 조금씩의 시차를 둔 시간싸움과도 같았다. 또한 이 모든 과정이 서로의 결의 이전에 각자의 선택이었기에 그 선택 또한 비난하고 원망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은 우리 역시 하나의 집단이기 이전에 나약한 개인이었기에 서운한 마음 또한 감출 수가 없었다.


두 명이 먼저 자리를 일어나 사무실로 이동했다. 다시 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이전보다 더 긴 고요의 시간이었다. 긴 침묵 끝에 우리가, 아니 내 스스로가 이 싸움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백들이 다시금 이어졌다. 여기서 누군가가 더 빠지게 된다면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군가를 강제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싸움을 더 이어갈 수 있다면 ‘고’, 그게 아니라면 ‘스탑’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차례차례 입을 떼었다.

 

마지막까지 결정을 망설이며 고민하는 몇몇이 남았다. 잠깐이나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10분이 지났을까, 누군가는 화장실을 다녀오고 담배를 피우러 가는 사이에도 자리에 남아 최후까지 고민을 이어가던 동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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