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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Mar 02. 2020

우리에게 블루하우스가 생겼다

[나와 우리의 투쟁일기_7]

쿨하고도 쾌랑쾌랑하게 “고”를 외치는 그 한마디에, 좀 전까지 심각함으로 바닥까지 뚫어버릴 것 같던 무거운 공기를 깨트리는 감탄사와 환호가 튀어나왔다.


그래 까짓것, 더 해봅시다!


1월 16일, 18명 중 2명이 빠져나갔다.
16명이 남았다.
16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지금보다 더 강한 강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는 천막농성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천막을 친다는 것은 지금과는 또 다른 막중함과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천막을 지켜야 하고, 살림을 꾸려야 하고 그만큼의 챙길거리들이 늘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천막은 한 번 설치한 이상 쉽게 막을 내릴 수도 없는 일이기에 보다 신중한 결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 조차 없다는 것이 우리의 처지였고, 지금과는 다른 강도로 이 싸움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1월 20일, 분주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누군가는 양 손 가득 담요, 발열조끼 등을 실어왔고, 또 누군가는 이민가방 한 가득 침낭, 가스버너, 램프 등을 가득 담은 채 낑낑거리며 나타났다. ‘천막 설치의 날’을 예고했던 바대로, 직원들의 표정도 몸짓에도 평소와는 또 다른 비장함이 감돌았다. 천막농성을 계획하며 헤어졌던 지난 금요일과 달리, 막상 이것이 현실이 되고 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막막했고 그만큼 분주했다.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아침 선전전을 마친 후 천막 설치가 개시되었다.

그간 오며 가며 보던 농성장 속 천막은 그냥 좀 큰 텐트이거니 싶었다. 그런데 막상 천막을 설치하려고 보니 이건 캠핑장에서 보던 텐트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먼저 커도 너무 큰 골격을 세우는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철로 된 골격을 펼치고 바닥에 고정하는 일은 남자 직원들의 몫이었다. 골격을 세우고 나니 그 위를 덮을 것들이 필요했다. 급히 조를 나누었고 인근에 있는 가장 큰 시장으로 향했다. 마침 설 연휴를 앞둔 시장은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하필 또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물어 물은 끝에 가게 앞 현관문에 ‘천막’이라는 단어가 적힌 철물점을 찾아냈다. 막상 가게에 들어서 보니, 색상, 소재, 두께, 길이 등등 천막의 종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원래 사려고 계획했던 투명 비닐은 천막 설치에 적당하지 않다며, 쇼호스트 버금가는 유난히 말이 길고 거창한 남자 사장님의 상품 홍보가 시작되었다. 비닐은 비닐일 뿐이고 이건 소재 자체가 남달라 썩어도 준치인지라, 방수도 되고, 바람도 막아주고, 설치하기도 편해 이것만한 물건이 없다는 설명을 한참이나 듣고 나서야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파란색 천막을 구매했다. 썩어도 준치라 그런지 가격 흥정은 먹혀들질 않았다.


천막과 몇 가지 자재를 더 구입하고는, 천막을 고정할 노끈과 고리를 사러 옆 가게에 들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게 사장님께 살며시 물었다.


“이 천막 ㅇㅇ주고 샀는데, 잘 산 거 맞아요?”

사장님이 조심스레 웃으시며 답했다.

“아이고, 저는 말 못 해요~~~”


아 당했다!


역시 투쟁도 농성도 해본 놈이 할 줄 알고, 천막도 쳐 본 놈이 볼 줄 안다고, 썩어도 준치라는 파란색 천막도 바닥에 깔 은박지도 모두 다 바로 옆 가게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 속닥속닥 속삭였다.

“직원들한테는 비밀로 해요,,”

그렇게 투쟁 초짜들의 비밀스런 장보기가 끝이 났다.  


트렁크를 한 가득 채운 짐들을 내리고 나니, 본격적인 천막 설치가 시작되었다. 높게 세워진 철제 골격 위에 한 천으로 된 천막을 덮어씌워야 했다. 들뜨는 천막들을 노끈으로 연결하고 테잎으로 단단히 고정하는 데에만도 한참의 시간이 소요됐다. 외벽을 만들었으니 이제 내부 공사를 할 차례였다. 평평한 바닥을 위해 먼저 플라스틱으로 된 깔판을 설치해야 했다. 그런데 하필 천막의 위치로 자리 잡은 곳이 경사진 땅이라 자리를 잡을 새 무섭게 깔판이 계속 흘러내렸다. 중력을 거스르지 못한 채 각기 흘러내리는 판들을 고정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주어졌다. 세개의 널찍한 깔판을 있는 힘껏 묶어 고정하고 나서야 수평감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 위에 스티로폼을 얹고 은박지로 된 장판을 깔아냈다. 마지막으로 이민 가방 한 가득 바리바리 챙겨 온 침낭까지 깔고 나니 어랏! 아늑함마저 느껴졌다. 그리 한 시간을 넘게 분주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익숙하게 보아 온 천막다운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천막 안을 보고 있자니, 근 한 달째 집 안 책상에 방치되어 있는 사랑하는 나의 펭수 달력이 생각났다. 새해가 되면 사무실 책상에 두어야지 하는 마음에 지마켓에서 삼십분을 넘게 기다려 구매한 달력이었다. 달력에 포함된 펭수 증명사진은 책상 파티션 한쪽에 붙여두어야지 하고 이미 위치까지 다 정해둔 터였다. 연말 공연에서 구입한 애정하는 나의 가수님의 굿즈도 생각났다. 새해를 맞이하야 사무실에 새롭게 갖다두어야지 하고 고이 모셔둔 머그컵이었다. 언제쯤 펭수달력과 새 머그컵을 사무실에 가져다 둘 수 있을까. 문득 5년간 드나들던 익숙한 사무실이, 어지러이 널브러진 책상이, ‘나의 일터’가 그리웠다.


그리 설치가 완료된 천막을 보며 오만가지의 감정이 들쑥날쑥거렸다.


결국 천막까지 쳐버렸구나,
이게 천막까지 칠 일이었나?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것이 눈에 보이는 이 싸움을 어떻게 이어가야 하지?


다들 침낭 위에 옹기조기 모여 앉자마자 치열한 오늘과 낯선 내일에 대한 한탄과 우려를 내뱉었다. 막상 천막까지 설치를 하긴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밤에는 누가 여길 지켜야 할지, 과연 이 천막은 언제까지 두어야 하는 것인지, 감춰두었던 걱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장 오늘 밤 누가 이곳을 지킬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부터 시작됐다.

걱정도 한 찰나, 늘 길 위에서 방랑하던 우리들에게 드디어 집이 생긴 것 같다며, 천막 세간살이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수다가 오고갔다. 천막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각자 챙겨야 할 물품들을 체크했다. 전기장판, 램프, 멀티탭, 펜, 옷걸이, 생수, 부탄가스, 컵라면, 믹스커피 등등 천막이든 집이든 사람이 드나드는 곳은 매한가지라고 챙길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어느샌가 한탄을 저만치 던져두고 계속되는 천막 살림살이에 대한 고민과 기이한 설렘으로 가득한 그 대화들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평소 작명이 특기이자 취미인 동료의 입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바로 이 천막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G.B.H. Gyeonggi Blue House!

본래 투명한 비닐로 씌우려던 천막이 남문시장 사장님의 꼬임 덕에 파란색 천막이 되어버린 탓에 우리의 천막은 블루하우스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블루하우스가 생겼다!


[이미지 출처: 똑똑도서관 김oo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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