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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Mar 04. 2020

농성은 나를 살찌게 한다

[나와 우리의 투쟁일기_8]

마치 집들이 손님을 맞이하듯 천막을 찾아오는 이들을 맞느라 하루하루가 분주해졌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처한 노동자들, 같은 영역에서 함께 얼굴 맞대며 일하던 이들, 일터에서 만나던 주민들이 추위를 마다않고 블루하우스를 방문했다. 아무리 천막이라도 손님맞이는 해야 할 터 하루 두 번의 선전전 외에 챙겨야 할 일들이 더욱 늘어만 갔다.


천막 안에서도 우리의 역할 분장은 분주히 이뤄졌다. 두어 명은 한 켠에서 주전자에 물을 채우고 버너에 불을 올리고 믹스커피와 차를 부지런히 날랐다. 또 몇몇은 방명록을 받고, 누군가는 우리의 그간 경과를 공유했다. 나름 블루하우스의 포토존도 있는 지라, 인증사진으로 블루하우스 방문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이폰 인덕션 카메라의 위엄과 함께 누구 하나 시키지 않았지만 착착착 이뤄지는 천막살이를 실감할 적마다 “이렇게 다들 하나같이 똑부러지게 일을 잘하는데 말이야!” 하며 감탄과 탄식이 오고 갔다.


우리의 투쟁 일상은 어느덧 잘 짜여진 시간표처럼 나름의 체계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출근 선전전을 마친 후 맞이하는 아침식사는 허기와 함께 오늘 하루를 다시 또 이겨내기 위한 결연함을 넘겨내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평소에는 챙겨 먹지도 않던 아침이었건만, 기가 막히게도 선전전을 마치는 시간마다 때맞추어 배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처음에는 아침밥 먹는 습관이 몸에 베이지 않은지라, 몇몇은 천막에 남아 도란도란 수다로 시간을 채워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확히 열한시쯤이면 배가 급격히 고파왔고, 그때 꺼내먹는 컵라면의 맛이란 마치 산 정상에서 먹는 희열 마냥 세상 최고의 만찬에 다름없었다. 문제는 그러고 나면 1시에나 먹을 수 있는 점심을 또 놓치기 십상이었고, 다시 또 3시쯤이면 슬금슬금 컵라면 박스를 뒤적뒤적하며 라면을 꺼내 들었다. 며칠을 그리 보내다 보니, 때맞춰 먹는 아침밥의 소중함이 절로 절실해졌다. 그러기를 며칠, 슬슬 천막에 남아 수다 떠는 사람들은 줄어들었고, 어느샌가 모두들 당연스레 밥집으로 일렬 행진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결정장애의 순간은 메뉴 결정이라고, 아침 메뉴 결정은 매일마다 거쳐야 하는 매우 중대한 고심거리 중 하나였다. 끼니를 찾아 매번 인근에 있는 역 근처 번화가까지 십분여를 걸어내려 갔다. 김치찌개, 순두부찌개, 부대찌개 등등 으레 역 주변에서 파는 조미료 듬뿍 친 찌개들을 섭렵해갔다. 그렇게 온갖 종류의 찌개들을 맛보았을 때쯤 조미료 가득한 그 맛들이 입에 물리기 시작했고, 역으로 나가는 십분 조차도 세상만사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농성 선배분들이 소개해준 인근 밥집의 첫 문을 열었다. 이름하야 한식뷔페! 말로만 들어온 '함바집'이었다. 인근 공사현장, 노동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주단골인 이곳에는, 아주머니 혼자 다 준비하시는 게 가능할까 싶은 만큼 매일매일 다른 국과 찌개, 온갖 반찬이 그득했다. 게다가 밥은 흑미밥과 백미, 두 가지가 늘 구비되어 있었고, 김치는 겉절이에서부터 익은 김치, 열무김치, 알타리, 볶음 김치 등이 순번을 바꿔가며 우리를 맞이하였다. 반찬 역시 두툼한 계란말이, 추억 가득한 분홍소시지, 매콤달콤한 비엔나소시지, 견과류 가득한 멸치볶음, 두부조림 등  매일마다 종류를 달리했고, 무엇보다 고기와 생선 중 하나가 꼭 메인 반찬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 모든 것들의 가격은 겨우 5500원이었다!


집에서도 사첩반상을 먹어본지가 언젠지 가물가물한데, 매일 다른 종류의 국과 나물, 김치, 생선, 불고기, 적당한 인스턴트까지 곁들여진 함바집 아침밥이야말로 더할 바 없이 만찬에 그지없었다. 특히 가장 좋아라 하는 소고기뭇국이 나오는 날이면, 아침은 먹지 않는다던 그 말이 무색스레 다시 한번 일어나 국과 밥을 떠오고는 순식간에 해치웠다. 360도의 동그란 하얀색 접시 위에 밥과 온갖 반찬을 담아내고, 그럼에도 잔반을 남기지 않는 스킬들이 늘어갔다. 그리 꼬박꼬박 아침을 챙겨 먹다 보니, 지금껏 아침이 당기지 않아 걸렀던 것이 아니라, 사무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커피도 마시고 간식도 꺼내먹으며 여유를 부렸으니 이 공복을 이길 수 있었던 거구나 하는 나름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하루는 적막하기만 했던 농성장 옆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인근에 농성장을 차려놓고는 밥먹으러는 다른 식당을 간다며 매번 사나운 눈초리와 함께 매일같이 온갖 종류의 민원을 넣어대던 블루하우스 바로 옆 아구탕집 아주머니의 목소리였다. 바로 그 아구탕집 아주머니와 벤치에 앉아 낮시간을 보내던 할머니들 간에 싸움이 붙은 것이었다. 한 바탕 큰 소리가 오간 후에 살짝이 눈치를 보며 무슨 일인지 할머니들 수다에 껴들었다. "저 여편네가 여차여차 요래조래~~~" 긴긴 하소연 끝에,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 세상의 명언이었다.


아니 천막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한 끼 만원짜리 밥을 어떻게 먹고 살어!

그러면서 저 건너편에 500원 더 싼 5000원짜리 함바집이 있다는 고급정보까지 툭 던져주셨다. 허나 아쉽게도 5500원짜리 함바집 사장님과 쌓인 의리가 있기에 500원 더 싼 그곳을 마다하고, 우린 늘 5500원짜리 함바집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천막으로 올라오면 자연스레 널브러져 있는 게 하루의 일상이 되었다.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믹스는 별다방, 콩다방 커피에 뒤지지 않는 세상 고급진 맛이었고, 요새 핫하다는 자판기우유 분말은 천하의 달달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블루하우스를 방문한 분들이 가져다주신 온갖 과자, 귤, 초콜릿 등을 하나씩 먹고 나면 어느덧 점심 선전전 시간이 다가왔다. 선전전을 마치고 나면 또 끼니때가 되어있었다. 특히 점심때면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야 한다"며 밥을 대접해주시러 방문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보다 풍요로운 특식으로 끼니를 해결해나갔다. 그게 끝이 아닌지라, 저녁에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족발, 치킨 등등 온갖 고칼로리의 먹을거리를 양손 가득 든 채 하루가 멀다 하고 블루하우스를 찾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이름하야 ‘밥 연대!’  이것 또한 소외된 노동자들 간에 연대를 다지는 하나의 농성 문화였다.


천막농성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렇게 농성을 하는데 왜 살이 안 빠지지...

그럴 만도 한 것이 농성을 하는데 유지는커녕 이상하리만치 자꾸 살이 불어갔다. 매일같이 블루하우스를 방문해주시던 농성에 이골이 난 선배분께서 귀띔을 해주셨다. ‘원래 농성을 하면 살이 찌는 법’이라고, ‘그게 바로 농성살이라고!’ 역시나 최고의 건강식은 규칙적인 삼시세끼라더니! 아침밥부터 하루 3끼를 정확히 챙겨 먹고, 틈틈이 온갖 간식과 당도 가득한 마실 거리들을 먹어댔으니 살이 찌지 않는 것이 이상할 일이었다. 군대 간 남자들이 그렇게 훈련을 받고도 왜 사회에 있을 때보다 살이 쪄서 나오는지 알 법도 같았다.

 

천막 농성은 그간 해왔던 투쟁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또 다른 울림의 연속이었다. 점심시간 잠깐 틈을 내어 방문해주신 인근 대학의 비정규직 청소 어머님들, 의정부, 고양 등 먼 곳에서 이곳까지 방문하여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시는 노동자들의 발걸음으로 블루하우스는 늘 비좁았고 말소리로 가득 찼다. 지쳐 누워있다가도 연대의 손길들이 방문하면 곧장 일어나 손님맞이를 하느라 한가할 틈이 없었다. 노동자에게 한 시간 여의 점심시간이 갖는 그 귀함을 알기에 잠깐의 짬을 내어 이곳을 찾는 분들의 발길과 메시지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더욱이 외딴섬처럼 천막 속에 위치한 우리에게 건네는 ‘너희는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 응원하는 우리가 있다’고, ‘이 싸움은 결코 의미 없지 않을 것'이라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오늘 하루를 버텨내고 내일 하루를 또 버틸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하나둘 찾아주는 이들이 늘어나는 만큼 블루하우스의 살림살이 역시 늘어만 갔다. 어느 날엔가는 아침에 와보니 전날까지 보지 못했던 탁상과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길가에 누군가 버려둔 가구들이 우리의 살림살이가 되었고 그곳은 블루하우스의 주방, 물품 창고가 되었다. 한켠에는 ‘나중에 이 물건들을 다 어떻게 감당하지’ 하는 걱정이 들만큼 많은 핫팩, 컵라면, 박카스, 커피들이 쌓여갔다. 핫팩은 다른 곳에서 농성을 이어가던 노동자들이 내어준 것이었고, 천막에 놓인 난로 또한 다른 일터에서 매 연말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마침 올 겨울에는 해고자 사태가 발생하지 않아 우리의 블루하우스에 내주었다던 그 난로는, 시기가 좀 늦었을 뿐 곧이어 발생한 해고자들을 위해 다시금 제자리로 옮겨갔다.


천막농성을 이어갈수록, 먼발치까지 옮기지 않더라도 우리 인근에 무수히 많은 해고사태와 비정규직 문제, 차별의 문제들이 산재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저시급을 받아가며 일하시는 청소 노동자분들, 용역업체가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직장에서 해고만 다섯 번을 당했다는 연식 가득한 노동자들, 수많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여전히 차디찬 겨울을 나고 있었다.


대학 시절, 학교 곳곳을 청소해주시던 어머님들이 떠올랐다. 심혈을 기울인 화장과 공들여 골라낸 옷으로 캠퍼스를 누비는 여대생들 사이에서 우리 어머니들은 늘 소수자였다. 심지어 젊음의 열기와 싱그러움 사이에서 쉽사리 드러나서는 안 되는 그림자에 머물렀다. 어머니들은 널찍한 캠퍼스가 무색하게도 화장실 한 칸을 휴게실로 써오며 말 그대로 그림자와도 같은 휴식을 취해오셨다. 어느 날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의해 어머니들을 위한 제대로 된 휴게실이 겨우 생겨났다. 그것 조차 강의 건물의 지하, 가장 안 쪽의 빛이 잘 드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것이 이천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그런데 15년이 훌쩍 지난 2020년, 아직도 수많은 어머니들은 법에서 정한 최저의 마지노선에 해당하는 시급을 받으며 여전히 학교 안 어두운 곳에 머물러 계셨다.  


인공지능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2020년이라지만, AI가 세상의 만능은 아닐 터였다. 어디를 가든 사람의 손길이, 노동의 숨결이 닿아야 유지되는 것이 사회였고 우리의 삶터였다. 때문에 그 어머님들, 아버님들의 노동과 나의 노동의 무게가 다르지 않았다. 노동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것이 갖는 마디마디의 가치는 모두 귀한 것이었고, 귀하게 여겨져야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치는 언제나 가치일 뿐, 끊임없이 가치를 배반하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었다.


농성이 진행될수록 그간 몰랐던, 때로는 외면했던 그 가치들에 시선이 옮겨졌다. 공교롭게도 우리의 블루하우스 근처는 늘 따놓은 당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주말드라마 촬영지였다. 눈비가 내리던 날에도 촬영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느 때라면, 쉽게 보기 힘든 드라마 촬영지에 흥미를 기울이며 남녀 주인공, 배우들을 찾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시선이 닿은 곳은 카메라 아래 서있는 배우들이 아니었다. 전세버스 안을 가득 메운 촬영 노동자들, 추운 날씨에 장비를 체크하고 촬영을 준비하는 노동자들의 맨 손이었다. 결국 멈추지 않는 눈 때문에 하루치 촬영을 철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배우를 못 본 아쉬움이 아닌, 눈비를 맞아가며 몇 시간 동안 준비한 촬영을 접어야 하는 노동자들의 한탄에 공감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밥을 통해 서로의 연대를 다지는 문화, 비록 나의 처지가 여전히 고달프지만 다른 누군가의 또 다른 고달픔에 공감하는 마음, 연대와 공감을 통해 마음에 또 하나의 마음이 덧대여 가는 시간들을 축적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축적되어가는 살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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