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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Mar 18. 2020

폐기되어가는 다짐

[나와 우리의 투쟁일기_10]

천막 한 켠에 걸어 둔 달력 왼쪽을 차지하던 1월의 숫자들도 어느덧 끝이 나고, 그 옆으로 칸이 옮겨갔다. 선물 받았던 유산슬 달력을 천막에 걸어놓으며 제발 이 달을 넘겨내지는 않길 바랬던 터였다. 그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달력 속 유산슬은 사랑의 재개발을 외치며 잇몸 가득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이 싸움이 한 달을 훌쩍 넘겨 2월로 이어지리라고는 설마일지언정 쉽사리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니 애써 하지 않았기에,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물리적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음을 모두들 직감하고 있었다. 


사무실을 떠나온 것이 어느새 한 달째였다. ‘막연한 희망’이 그간 우리를 버티게 한 힘이었으나, 막연함만으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치가 분명함을, 그 임계점이 가까워져오고 있음을 또한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때때로 이 모든 순간이 꿈만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더 정확히는 지금이 꿈인 것인지, 지나온 시간들이 꿈인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휴대폰 속 지난 앨범을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 앨범 속에는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하루를 기록으로 남겨뒀던 기념의 의식들이, 그 찰나의 순간들이 담겨있었다. 


뜨거운 여름볕 아래 제주 해안가에서 모래로 뒤덮인 우리,
너나할 것 없이 빠져든 풀장의 물기를 닦아내며 밤새 고기를 굽고 있는 우리, 
아껴둔 제주 에일맥주를 빼앗긴 뒤 연신 투덜대고 있는 우리, 
카니발 뒷자리에 빼곡히 몸을 구겨앉은 채로도 내내 시끌벅적하던 우리,     


그 찰나에는 처음으로 모두 함께 큰 걸음을 했던 지난여름 제주의 풍경이 담겨있었고, 그 풍경 속 우리의 모습들이 담겨있었다. 사진첩을 거슬로 올라갈수록 2015년을 시작으로 그만큼의 시간과 발품을 켜켜이 쌓아온 그만큼 나눠온 마음과 노력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사진 안에는 매 순간마다 서로의 어제를 반추하고 걸어갈 길을 기약하던 기대와 약속들이 스며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함께 걸어갈 길이 폐기된 이 상황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앞날의 기대와 다짐 또한 차츰 폐기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 순간순간 목이 메는 날들이 잦아졌고, 불콰한 정신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매일이 늘어갔다. 순간의 힘듦보다 점차 침복되어 가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막연한 그 희망이라도 부여잡고 오늘 하루를 또 버틸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지나온 기억과 그 기억 속에 담긴 우리였다. 지난여름의 뜨거운 햇볕 아래 우리가 무색하리 만큼, 추운 바람을 견딘 채 좁은 천막 속에 모여 앉은 지금의 우리를 마주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하지 않아도 알듯한 그 눈짓들에 종종 웃음이 새어 나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투쟁의 일상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방문과 사건들은 연이어졌고, 그럴 적마다 침복하던 마음에 바람이 일랑거렸다. 어느 한적한 오후, 누군가 조심스레 블루하우스의 문을 열어왔고, 손을 꽉 쥔 채 “밥 잘 챙겨요”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도망가듯 급히 자리를 떠났다. 꽉 쥐었던 손에는 고이 접어둔 꾸깃한 봉투가 남아있었다. 그분은 블루하우스 안으로 들어온 처음이자 유일한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의 신분으로 이곳에 발을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블루하우스 안에는 다른 때보다 조금 긴 침묵이 흘렀다.   

 

유난히도 볕이 좋던 날, 여느 때와 같이 귀한 점심시간을 쪼개어 인근 대학 비정규직분회 소속의 어머님들이 발길을 내어주셨다. 점심 선전전을 마친 후 건네주신 봉투 안에는 만원, 오천 원,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이 뒤섞여있었다. 각자의 사정만큼 주머니에서 꺼내 둔 천 원, 오백 원이 모여 채워진 그 봉투를 보며 다들 연신 눈가를 훔쳐댔다. 투쟁의 매일매일을 기록하는 투쟁일지에 적힌 연대기금은 대개 오만 원, 십만 원과 같은 만원 단위로 끝이 난다. 한편, 그 날 어머님들이 건네주신 연대기금은 천 원 단위로 고이 기록되었다. 

'636,000원', 8590원의 최저임금, 그것마저도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로 삶을 지켜내시는 어머님들이 모아주신 그 봉투를 통해 우리는 돈을 넘어 연대의 마음을 건네받고 있었다. 


우리의 처지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는데 우리의 이름으로 된 통장은 점점 풍족해져 갔다. 하루를 멀다 하고 많은 곳에서 연대기금을 보내왔고, 이걸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걱정스러울 할 만큼 통장 내역이 길어져만 갔다. 불어나는 통장 내역만큼이나 블루하우스의 짐 또한 계속 늘어갔다. 어느덧 인근을 산책하며 천막 안에서 쓸만한 물건 가지들을 훑어보는 눈썰미가 늘어갔다. 그러다가 쓸만한 물건이 보일라치면 주변의 눈치를 쓱 본 뒤 자연스레 물건을 챙겨 들었다. 득템한 살림살이들은 블루하우스 한 켠의 프레스센터가 되었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의자가 되었다. 


그렇게 블루하우스의 투쟁 전선에 적응해가는 생활의 노하우는 늘어갔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노하우까지 늘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곰곰이 머릿속에 숫자들을 굴려가며 계산기 어플을 켜드는 날이 반복됐다.


25일, 두 장의 카드값 납부일
26일, 대출 이자와 원금 납부일 + 차 할부값 납부일
28일, 집 대출 이자금 납부일 


'그새?!'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자동차 연료 계기판 속 화살표가 때마다 왼쪽 바닥을 가리켰다. 나가야 할 돈은 쌓여갔고, 통장 잔고는 줄어만 갔다. 이미 한 달치의 월급을 거른 차였건만, 언제쯤 다음번 월급이란 걸 받아볼 수 있을지는 불투명했다. 때맞추어 나가는 보험비, 휴대폰 요금, 아파트 관리비와 임대료, 생활비는 차곡차곡 숫자를 불려 갔다. 다달이 나가야 할 돈들은 어찌도 이리 정확하고 친절한지, 돈 나갈 날짜를 알려주는 문자가 단 하루도 어긋나지 않고 수시로 울려댔다. 지금껏 '일을 꼭 생계 때문에 하는 건 아니지' 하며 일에 대해 나름의 의미부여를 해왔었건만,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쌓여가는 카드값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지, 언제쯤 끝이 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주말 아침 느지막이 집어 든 휴대폰 속 단톡방에는 수십 개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우리도 몰랐던 사이, 투쟁 현장에 나와있는 우리 열명에 해당하는 채용공고가 게시된 것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터였다. 고용 취소를 예고하던 그 문자가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정말 우리가 돌아갈 곳은 없는 건가
다 함께 일하기 위해 시작된 싸움이었는데 이렇게 다 함께 실직자가 되는 걸까


그간 외면했던 모든 우려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우려가 실제가 되어 와 닿는 타격감은 그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그동안 멘붕이란 단어를 너무 쉽게 남용했음에 반성하며, 지금이야말로 정말 멘붕이라는 단어가 제격인 상황이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몸은 정직하여 천막에서의 두 번째 생리가 시작되었다. 또다시 시작된 배앓이와 쑤셔오는 허리에 옆에 선 직원을 부여잡으며 속삭였다.


"천막에서 생리를 두 번이나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풉..."


그리 조여 오는 허리만큼이나 통장 사정도, 마음도, 우리가 돌아갈 길도, 모든 것이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막연한 희망으로 이어가던 천막살이의 임계점이 머리 위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천막살이를 마감할 날 또한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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