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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Mar 31. 2020

나는 매일 카페로 출근한다

[나와 우리의 투쟁일기_그 마지막]

2020년 2월 17일,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넘는 노동투쟁을 마치고 우리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앉은 사무실 책상은 낯설었고 내 자리가 아닌 것만 같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함께 상상했던 일터는 온데간데없고, 투쟁을 통해 쌓아 오던 기대는 멀찌감치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다. 오전 내내 오래간 비워두었던 자리를 정돈하고 뒤죽박죽인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다가 혼자 카페테라스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축내었다. 전날 본 기상예보처럼 눈 앞엔 눈발이 날리고 거센 바람이 볼을 할퀴었다. 그리고 메서운 바람보다 휘젓는 사념들이 머리를 더욱 할퀴었다.


길고도 힘겨웠던 고민 끝에 본부장과 마주했다.

(참고로 새로 임용된 본부장 얼굴을 제대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여기에서 퇴사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며, 생전 처음 보는 본부장이라는 사람 앞에서 도로록 눈물이 흘렀다. 사무실로 복귀하기로 결정한 날, 모두들 눈물을 훔칠 때도 애써 참아낸 눈물이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아껴온 일터였다는 것,
그만큼 일에 한껏 욕심도 부려왔고 가진 것들을 쏟아부었다는 것,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일 할 자신이 없다는 것,
그것은 내가 아껴온 일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


지금 말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허나, 그것이 이 순간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전부였다. 매일 아침마다 괴로운 정신으로 일터로 향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뭐 지금까지도 줄곧 일터로 가기 위해 깨어내는 정신은 늘 무겁고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이 귀찮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귀찮음과 괴로움은 다른 감정이었다. 비록 출근길이 귀찮고 고되어도, 막상 그곳에 도달한 나는 괴롭지 않았다. 때때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아 스스로를 괴롭힌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내 일을 하기 위해 겪어내야 할 괴로움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내가 겪게 될 괴로움은 '나'라는 얕은 감정의 인간이 차마 감당하기 어려울 감정임을 알고 있었다.


지나고 보니, 이곳에서 일한 5년 여의 시간 동안 참 다이나믹한 일들이 매해마다 연속되었고, 한시도 순탄한 때가 없었다. 첫 해 마주한 센터장님의 부고, 이후 매 연말마다 반복되던 평가와 그를 둘러싼 잡음들, 그 외에도 여러 번의 위기들. 하지만 그때마다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특유의 시니컬함으로 그것들을 지나왔고, 그리 함께 어려움을 버텨낸 이들이 지금껏 우리의 일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온몸으로 견뎌내게 한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애정과 이것을 지키고 싶다는 모진 욕심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지키고 싶은 것을 모두 상실한 지금, 앞으로 닥칠 괴로움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 이상의 것이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방식과 이겨냄이 존재했다. 일터에 남은 동료들은 그곳에 남아 우리의 일을 지키며 이겨냄을 선택하였고, 나는 여기에서 그만 정리하는 것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일을, 아니 내 기억 속에 남은 우리의 일을 고이 정리하고 싶었다.    


퇴사를 말하고 곧장 짐을 챙겨 천막으로 향했다. 수원까지 달리는 한 시간 반의 거리마다 눈발이 휘몰아쳤고 뒤늦게 대성통곡이 튀어나왔다. 감춰왔던 모든 감정들이 뒤섞이며 마치 드라마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차 안에서 핸들을 부여잡고 큰 소리로 울어냈다.


그리 도착한 천막에서는 미리 예정되었던 마지막 촛불문화제가 계획되어 있었고,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의 몫을 대신하여 해고된 동료 몇몇과 함께 해주는 이들이 모여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촐하지만 함께 한 이들의 손길 하나하나가 모여 촛불을 완성하였고,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발을 맞아내며 마지막 불을 켜내었다.


마침 그 날은 서른여섯 번째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둥그렇게 모여 선 모든 이들이 합창하여 생일 노래를 불렀고, 그 어떠한 케익의 초보다 빛나는 촛불들이 2020년의 생일을 밝히고 있었다. 생애 잊지 못할 또 한 장의 페이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터를 지켜나가고 있다. 함께 했던 동료들 역시 크나큰 용기로 우리가 해오던 그간의 일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 각자의 결단과 용기로 우리는 일상을 이어 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매일마다 집 앞 카페로 출근하며 백수 생활을 이어가고, 아니 더 정확히는 연명하고 있다. 생각보다 백수 생활은 지루하고 백수 나름의 고단함이 존재한다. 백수에게 한잔에 5천 원짜리 커피가 무슨 사치이냐 하겠지만, 아직 나에겐 몇 달간의 실업급여가 남아있다는 합리화 끝에 매일 나는 카페로 향한다.


백수가 되고 나니, 일이란 내 삶의 나태함을 합리화하고 숨길 수 있는 꽤 폼나는 그럴듯한 핑곗거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 대낮까지 자고 일어나도 할 일은 없고 내가 이리 나태한 인간이었구나를 다시금 온몸으로 체감하는 날들이 반복되고 있다.

한편, '나'라는 인간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알게 되는 꽤 괜찮은 나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종종 이 시간을 즐기라며, 여행도 다녀오고 맘껏 쉼을 즐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백수의 삶을 살다 보니, 나는 그다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활동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그저 집에서 블루투스로 음악을 틀어놓고 멍 때리기를 좋아하는, 그러다가 책을 꺼내 들고 이내 내려놓는, 그러다 결국 맥주를 꺼내 들어 삼켜내는 매우 재미없고도 따분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넘는 백수생활을 통해 넷플릭스라는 가장 큰 친구를 건져냈다!


하지만 백수가 된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시 내가 품었던 용기와 결단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의 동료들이 힘겹게 내었던 용기와 결단을 존경하고 응원한다. 비록 내 통장은 볼품없고 때마다 백수 상태를 인증하는 행위를 통해 실업급여라는 유일한 수입을 기다리며, 백수에게 주어진 일종의 유예기간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종종, 아니 매우 자주, 함께했던 우리를 떠올리고 매일 아침마다 나란히 피켓을 든 채로 소곤소곤 수다를 떨어대던 그 날들을 기억한다.


지나고 보니, 한겨울의 어두컴컴한 새벽을 헤쳐가며 양주에서, 의정부에서, 서울에서, 어떻게 매일마다 수십 킬로를 달려 기나긴 투쟁을 이어갔었는지, 어디서 천막이란 걸 설치할 용기들이 샘솟아 나왔는지, 어쩜 그리도 서로를 지키기 위한 마음과 시간을 기꺼이 내놓고 나눌 수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이 아끼는 소설 속 고이 접어 둔 장면들처럼 마음에,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또한 그래서 우리가 걸어온, 걸어갈 걸음걸음들이 아련하여 아려온다.


우리의 투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들은 오늘도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출근하던 그때처럼, 주말마다 몰아서 수차례의 빨래를 돌려대고 손톱을 깎고 눈썹을 다듬는다. 같이 사는 친구는 어차피 백수 주제에 왜 그 많은 평일을 두고 주말에 몰아서 종일 세탁기를 돌려대냐고 비웃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변한다.


백수도 백수 나름의 삶의 규칙이란 게 있는 거야!!!


그렇게 난 오늘도 카페로 출근했다. 내 퇴근시간은 여느 직장인들처럼 6시다. 퇴근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 야호! (참, 참고로 농성살은 정말로 빠지지 않고 여전히 나와 함께하는 '내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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