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굴레, 두번째 기록]
남자는 일관성 있는 삶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몸소 실천이라도 하듯,
평생을 게으름과 무능으로 일관한 사람이었다.
아니, 한때 그도 다른 삶을 꿈꿨을지 모른다.
허나, 사람의 천성이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강한 힘을 발휘했다.
남자는 다행히도, 공부든 뭐든 크게 주눅 들지 않게 커가는 딸을 보며 특유의 부산 사투리로 종종 말했다.
"사람은 한양에 가서 살아야 한다,
너도 서울로 가야지 않긋나, 알겠나"
그 말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딸과 아들은 그의 말처럼 서울로 상경했고,
그에게 들를 적마다, 그는 굳이 기사식당을 가서 동료 기사들을 향해 딸을 일으켜 세웠다.
"우리 딸, 알지? 그 시골 촌에서 서울로 대학을 왔잖아,
그럼그럼, 시골촌년이 사대문 안에 입성했음 출세한 거지"
그리 서울에서의 삶을 이야기하던, 서울로 상경한 딸을 자랑하던 그는,
무기력과 술에 취해, 딸의 대학, 대학원 두 차례의 졸업식 그 어디에도 오지 못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아내를 잃은 후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했던 남자는 서서히 그 천성을 되찾아갔다.
오랜만에 그를 찾아간 날, 불만 끄면 숨이 멎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코를 골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불을 끄지 말라고.
더 이상 그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잠을 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밝은 불 아래에서 편히 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맘때의 그는 어둠과 밝음 그 무엇도 상관없이 늘 잠들지 못했다. 새벽 내내 잠에서 깨어 서성이며 밤새 담배를 피워댔다.
그렇게 서서히 그는 무너져갔다. 사람에게 스스로 무너짐보다 무서운 것은 가진 것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우울증과 알콜에 잠식되어 그는, 작게나마 그가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갔다. 그런 그를 감당하기 힘들어질 즈음, 구급차 안으로 그를 몰아넣고는 딱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병원으로 옮겨냈다.
구급차 안에서 쓰러져가는 아비를 바라보며, 그가 다시 삶을 일으켜 살아낼 수 있길 바랬다.
그리 다시 살아갈 힘을 가지길 바라며 그를 밀어 넣고 온 밤이면, 정작 나는 살아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도, 쉽게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곁에 있던 이와 사랑을 나누고 밤을 보내던 날들, 여느 때와 같이 나란히 누워 있던 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그리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갈구하던 그가 우울과 술에 찌든 채 생을 마감하였다고 했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했다.
빈소는 차리지 않았다.
찾아올 이가 없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다행인 일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슬픔은 사치이거나 기만인 시간이었다.
가진 것들을 서서히 하나씩 놓아두던 마지막 즈음, 그는 유일한 재산이었던 택시를 처분했다. 자식들을 길러내던 처가의 목돈을 빌려 오래전 겨우겨우 장만한 택시였다. 처분한 돈의 일부는 그의 장례 비용으로 쓰였다. 사람이 죽고 그 죽음을 정리하는 일 자체로도 그리 큰돈이 든다는 것은 처음 안 일이었다.
지나고 보니,
어렸어서, 이미 죽은 자의 죽음조차도 쉽지 않은 살아있는 자들의 절차 때문에,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후련함에 죽음의 순간순간마다 소리 내어 크게 울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한 번도 크게 울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정해진 양을 채울 작정이라도 한 듯
그만큼의 울음을 오롯이 간직하게 할 줄은 알지 못했다.
언제고 그는 말했다. 사람을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그러다 또 어느 날엔 (고작 어릴 적 글쓰기 상을 몇 번 받았던 딸을 보며) 책을 읽어야 한다며 내 딸이 글을 썼으면 좋겠다며 거드름을 피워댔다.
허나, 나 역시도 천성이란 별 수 없다는 듯, 많은 순간 모든 것에 무디어졌고, 무디어지려 애써왔다. 삶이 치열할 땐 그 고달픔에 스스로를 몰아넣으며 힘겨웠고, 그렇지 않을 땐 여백 가득한 빈 공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가 시시하여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알고 있다.
글이란 자기 이야기를 넘어서야 하나, 나는 나의 부재와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고,
나를 넘어설 수 있는 어떠한 치유도 극복도 겪어내지 못했다고, 그래서 온통 상처 투성인 글뿐일 거라고,
하지만 스스로를 털어낼 수도 있는 것 또한 이것뿐이라고.
그렇게 어느덧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