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굴레, 네번째 기록]
모든 일은 저마다의 역사 속에 절묘한 타이밍을 가지듯, 아빠의 마지막 소식을 들은 날은 해외장학생으로 선정된 동생 녀석이 유학길을 떠나기 사흘 전이었다.
이 일을 녀석에게 알려야 할지,
아니면 가만히 입을 닫고 표정을 숨겨내며 태연하게 이 아이를 보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끝내,
어지러운 마음보다 큰 것은 두려움의 감정이었다.
'혼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휴대폰 속 몇 초간의 침묵,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야 동생은 차분하고도 덤덤하게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리 우리는 이틀 안에 하나하나의 미션을 해결해야 했다.
그것은 모든 미션을 완료한 후에도
결코 안도와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의무를 가장한 애도의 회피였다.
사흘 후,
출국심사대에 들어가는 동생을 가만히 안아보았다.
누구 하나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가쁘게 숨을 들이켰고, 조금은 거칠어진 내쉬는 숨이 티 나지 않도록 삼켜냈다.
가만히 등을 몇 차례 토닥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위로였고, 인사였다.